그때 악몽은 되살아나고 있다
인재 떠난 황폐한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아픈 현대사 하나. “자동통역인공지능센터 인력 20여명 중 3명만 남았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김상훈 자동통역연구실장이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상황을 두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센터뿐일까. 전자통신연구원의 밤을 밝히던 연구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4명 중 한 명꼴로 떠났다. 박사급 팀장은 대부분 옷을 벗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IT 한국’을 일으킨 주역이다. 지금의 스마트폰도 전자통신연구원 두뇌들이 힘을 보태 통신의 새 지평을 연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 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왜 떠난 걸까. 부도난 나라에 닥친 구조조정 열풍, 이어 분 벤처붐. 많은 연구원은 이미 구조조정에 고개를 숙인 채 보따리를 쌌다.
강호원 논설위원 |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되풀이되는 악몽을 꾸는 듯하다. 전문기술 인력은 또 탈출한다. 조선 3사를 떠난 기술인력은 2015년에만 5730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둘 중 하나는 핵심전문 인력이다. 자동차에서는 7668명, 철강에서도 4142명의 숙련 기술자가 떠났다. 다른 업종인들 얼마나 다를까. 지난해 불황 바람은 더 매서웠으니 떠난 기술자는 더 많을 게다. 조선의 핵심인력 수백명은 일본과 중동으로 갔다고 한다. 어쩌면 17~18년 전과 이리도 똑같을까.
왜 가는 걸까. 내쫓으니 회사를 떠나야 하며, 써 주겠다고 하니 간다. “기술을 유출해서는 안 된다”고?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탈출의 열병은 가라앉을까. 무너지는 경제, 어디를 봐도 적신호만 깜박거린다. 올해 경제성장률 2.6%, 구조조정이 멈출 리 만무하다. IMF 전망 세계 평균 성장률 3.4%, 해외기업은 우수한 인력을 더 필요로 한다.
어디 그뿐인가. 외풍은 거세지고 있다. 보호주의를 외치는 미 트럼프정부. 미국은 금리인상 열차에도 올라탔다. 새해 벽두부터 중국 위안화 환율은 또 요동친다.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려 성장률을 높이려는 중국. 하지만 헤지펀드가 위안화 절하에 베팅을 하니 지난해 초 헤지펀드와의 전쟁 후 1년 만에 중국은 또 외줄타기를 시작한 것 같다. 이래저래 위안화는 절하 쪽으로 움직일 소지가 농후하다. 보호주의, 금리인상, 위안화 절하. 이 세 가지는 1997년 한국의 부도를 부른 망령이다. 나라경제는 창조력을 잃고 있으니 퍼펙트 스톰은 얼마나 멀리 있을까. 탈출 열풍은 더 거세지지 않을까.
어찌 해야 할까.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멀리 보고 살아날 방법을 생각하는 일이다. 제갈량이 말하지 않았는가.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하라”고.
새겨야 할 공식 하나. “창칼을 버린 자는 다시 싸울 수 없다.” 고려 현종 9년, 1018년 요 소손녕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또 쳐들어왔다. 요의 침입은 이때가 절정이다. “9년 12월 거란 소손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했다”(九年十二月 契丹蕭遜寧 帥兵來侵). 적장을 소배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동국병감에는 소손녕이라고 쓰여 있다. 8년 전 개경까지 불바다로 만든 요에 항복을 반대한 강감찬. 그는 이때 상원수가 되어 귀주 동쪽에서 대회전을 벌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적의 시체는 들판을 뒤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버린 말 갑옷 무기는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간 군사는 수천 명이었다.”
거란은 이후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창칼을 버리지 않았으니 고려는 요에 맞서고, 창칼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요는 다시 고려를 범하지 못한 것 아닐까.
우리의 창칼은 무엇일까. 인재다. 아무리 급해도 인재를 버리면 기업에도, 나라에도 미래는 없다. 눈만 뜨면 나라를 뜯어고치겠다는 정치인들. 어찌 나라를 일으킬지는 생각하고 있을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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