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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창칼을 버리면 다시 싸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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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09 21:49:11 수정 : 2017-01-09 21: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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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와 인재 엑소더스
그때 악몽은 되살아나고 있다
인재 떠난 황폐한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아픈 현대사 하나. “자동통역인공지능센터 인력 20여명 중 3명만 남았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김상훈 자동통역연구실장이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상황을 두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센터뿐일까. 전자통신연구원의 밤을 밝히던 연구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4명 중 한 명꼴로 떠났다. 박사급 팀장은 대부분 옷을 벗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IT 한국’을 일으킨 주역이다. 지금의 스마트폰도 전자통신연구원 두뇌들이 힘을 보태 통신의 새 지평을 연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 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왜 떠난 걸까. 부도난 나라에 닥친 구조조정 열풍, 이어 분 벤처붐. 많은 연구원은 이미 구조조정에 고개를 숙인 채 보따리를 쌌다.


강호원 논설위원
어디로 갔을까. 통계 하나. 해외 취업이민자 1999년 5267명, 2000년 8369명. 1997년에는 3287명에 지나지 않았다. 불어난 이민자 중에는 전자통신연구원의 인재도 많이 끼어 있다. “모두 미국으로 갔다.” 그때 들은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이 남아 있었다면? 구호만 요란한 껍데기 IT강국이 아니라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IT제국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되풀이되는 악몽을 꾸는 듯하다. 전문기술 인력은 또 탈출한다. 조선 3사를 떠난 기술인력은 2015년에만 5730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둘 중 하나는 핵심전문 인력이다. 자동차에서는 7668명, 철강에서도 4142명의 숙련 기술자가 떠났다. 다른 업종인들 얼마나 다를까. 지난해 불황 바람은 더 매서웠으니 떠난 기술자는 더 많을 게다. 조선의 핵심인력 수백명은 일본과 중동으로 갔다고 한다. 어쩌면 17~18년 전과 이리도 똑같을까.

왜 가는 걸까. 내쫓으니 회사를 떠나야 하며, 써 주겠다고 하니 간다. “기술을 유출해서는 안 된다”고?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탈출의 열병은 가라앉을까. 무너지는 경제, 어디를 봐도 적신호만 깜박거린다. 올해 경제성장률 2.6%, 구조조정이 멈출 리 만무하다. IMF 전망 세계 평균 성장률 3.4%, 해외기업은 우수한 인력을 더 필요로 한다.

어디 그뿐인가. 외풍은 거세지고 있다. 보호주의를 외치는 미 트럼프정부. 미국은 금리인상 열차에도 올라탔다. 새해 벽두부터 중국 위안화 환율은 또 요동친다.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려 성장률을 높이려는 중국. 하지만 헤지펀드가 위안화 절하에 베팅을 하니 지난해 초 헤지펀드와의 전쟁 후 1년 만에 중국은 또 외줄타기를 시작한 것 같다. 이래저래 위안화는 절하 쪽으로 움직일 소지가 농후하다. 보호주의, 금리인상, 위안화 절하. 이 세 가지는 1997년 한국의 부도를 부른 망령이다. 나라경제는 창조력을 잃고 있으니 퍼펙트 스톰은 얼마나 멀리 있을까. 탈출 열풍은 더 거세지지 않을까.

어찌 해야 할까.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멀리 보고 살아날 방법을 생각하는 일이다. 제갈량이 말하지 않았는가.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하라”고.

새겨야 할 공식 하나. “창칼을 버린 자는 다시 싸울 수 없다.” 고려 현종 9년, 1018년 요 소손녕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또 쳐들어왔다. 요의 침입은 이때가 절정이다. “9년 12월 거란 소손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했다”(九年十二月 契丹蕭遜寧 帥兵來侵). 적장을 소배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동국병감에는 소손녕이라고 쓰여 있다. 8년 전 개경까지 불바다로 만든 요에 항복을 반대한 강감찬. 그는 이때 상원수가 되어 귀주 동쪽에서 대회전을 벌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적의 시체는 들판을 뒤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버린 말 갑옷 무기는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간 군사는 수천 명이었다.”

거란은 이후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창칼을 버리지 않았으니 고려는 요에 맞서고, 창칼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요는 다시 고려를 범하지 못한 것 아닐까.

우리의 창칼은 무엇일까. 인재다. 아무리 급해도 인재를 버리면 기업에도, 나라에도 미래는 없다. 눈만 뜨면 나라를 뜯어고치겠다는 정치인들. 어찌 나라를 일으킬지는 생각하고 있을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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