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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벌거벗은 생명’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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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7 01:19:57 수정 : 2017-01-17 0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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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인간의 비유 같은 ‘호모 사케르’ / 우리 시대 생명가치 고통스러운 파국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서양정치사와 철학사를 반성적으로 점검하면서 ‘벌거벗은 생명’들을 위한 변론을 모색한 책이다.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인 ‘호모 사케르’는 주권의 권력 역학에 의해 흔히 양쪽 모두에서 배제될 수 있는 일종의 ‘늑대 인간’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양가성을 성찰하기 위해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의 자료를 뒤지다가 거기서 신성함의 개념과 인간 생명 자체가 결부되고 있는 최초의 형상을 발견한다. 페스투스 논집의 ‘말의 의미에 대해’의 한 대목을 가져오는 것으로 그의 본론은 진행된다.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사실 최초의 호민관법은 만약 누군가 평민 의결을 통해 신성한 자로 공표된 사람을 죽여도 이는 살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이로부터 나쁘거나 불량한 자를 신성한 자라 부르는 풍습이 유래한다.”

종교법과 형법이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시기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의문에서 아감벤의 논의는 비롯된다. ‘그를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과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의 금지라는 것의 병치’를 경제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호모 사케르가 부정하다면 어떻게 신성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호모 사케르가 신의 소유물이라면 어째서 그를 죽이고도 부정이 타지도 않고 신성모독을 범하지도 않게 되는 것일까? ‘사케르(sacer)’라는 라틴어는 ‘성스럽게 되다’와 ‘저주를 받다’는 양가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의 법과 신의 법 둘 다의 외부에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의 생명을 탐문하기 위해 저자는 법학에서 인류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는데 그동안 자명하다고 믿었던 전제나 개념 중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인 맥락에서 주권 권력의 문제로 사태를 풀어내려 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살아있는 생명체를 지시하는 ‘조에’(zoe)와 개인 특유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뜻하는 ‘비오스’(bios)를 나누고, 비오스에서 멀어진 조에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불렀던 이들의 운명은 아감벤이 보기에는 주권 권력의 배제와 포함 논리의 향방에 따라 달라진다. 생사여탈권을 쥔 주권이 조에 쪽만 보면 호모 사케르는 가치 없는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실업 상태의 노숙인, 불법체류자, 난민 등 근대 이후 공동체에서 배제된 채 수용소에 감금됐던 벌거벗은 생명들에 저자의 눈길은 오래 머문다.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겐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분명한 언어로 가치를 추구하고 비오스를 갈구했지만 공무원들은 그를 한갓 조에 취급하며 배제한다. 그의 벽화 같은 서명 작업이 드라마틱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감, 자유의 문제와 관련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감동적인 영화를 보며 떠올린 책이지만, 책을 다시 뒤적이는 내내 우리 시대 생명 가치의 현주소를 헤아리며, 가치 파국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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