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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이육사 항일 순국한 베이징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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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9 21:41:22 수정 : 2017-01-19 21: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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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에서는 지난 16일 육사 이원록(1904~1944) 선생 순국 73주기 추념식이 열렸다. 이날은 이육사가 중국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기개와 절개로 대변되는 선비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글과 행동으로 끝까지 일본에 항거했다.

본명이 원록(源綠)인 그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베이징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류돼 3년형을 받고 투옥됐다. 이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


이육사(위 사진)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 1944년 1월의 새벽에 숨진 중국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
독립기념관 제공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군정부·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다. 중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격문사건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례 옥고를 치른다. 혹독한 감옥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진로를 고민하다 시와 글을 통해 새로운 항일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1930년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첫 시 ‘말’을 발표하고, 1937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포도’와 ‘절정’ 등을 김광균·신석초 등과 함께 창간한 동인지 ‘자오선’에 선보인다. 그 후로 한글 탄압이 심해지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항일시들을 내놓는다.

1942년엔 마치 광복의 날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한다. 그리고 해방 1년 전인 1944년 1월의 새벽,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간 중국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가 숨을 거둔 곳은 베이징시 네이이구 동창후둥 1호(현재는 28호)이다. 왕푸징에 위치한 이곳은 지금은 건물 내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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