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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일왕 장인 처단 조명하, 대만에 묻힌 호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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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27 10:30:00 수정 : 2017-01-26 20: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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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일왕의 장인이자 육군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를 숨지게 한 조명하(1905~1928) 의사는 순국 직전 형리((刑吏))가 “할 말이 없는가”라고 묻자 이처럼 의연하게 말했다.

조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조 의사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황해도 출신 김구와 노백린 선생 등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조명하 의사(작은사진)가 ‘구니노미야 저격사건’으로 복역 중 순국한 타이베이 형무소 터의 북쪽 외벽.
독립기념관 제공
그 무렵 아들을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부인을 보러 어머니와 함께 가던 길에 조 의사는 갑자기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여중구 등 친구 6명이 마련해 준 여비를 받아 고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 의사는 일본으로 향했다. 조 의사는 오사카에서 공장과 상점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오사카상공전문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그는 오사카에서는 일본인 수괴를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일단 타이완(대만)으로 향했다.

조 의사는 1927년 11월 대만에 도착해 타이중시 지광로에 있는 부귀원이란 찻집에서 일했다. 당시 대만에 와있는 육군 특별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며 육군대장, 군사 참의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1928년 5월 14일 지사 관사에서 구니노미야를 태운 무개차가 타이중시 다이쇼초(일제지명, 현 중정로)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 이르자 품고 있던 단도를 빼내 들고 자동차 뒤쪽에 뛰어올랐다. 조 의사가 던진 단도는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가벼운 상처를 입힌 뒤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독이 묻은 단검을 맞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는 6개월 후 숨졌다.

현장에서 타이중경찰서로 압송된 조 의사는 6월14일 타이베이 형무소로 이송됐다. 그해 7월 18일 대만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소위 ‘황족위해죄와 불경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조 의사는 3개월 뒤인 10월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넷이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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