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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임금님의 선물 한강 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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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08 01:07:36 수정 : 2017-04-11 11: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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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빙고·서빙고에 음력 2∼10월 보관 / 한여름 의금부 죄인들에까지 나눠줘
최근 연이은 추위로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한강의 일부가 얼어붙어 있다. 올겨울 들어서 한강은 지난달 26일 공식적으로 결빙됐다. 한강의 결빙은 1906년부터 노량진 앞 한강대교 남단에서 둘째와 넷째 교각 상류 100m 부근의 결빙을 기준으로 관측하고 있다. 즉, 이 지점에 얼음이 생겨 물속을 완전히 볼 수 없는 상태를 한강의 결빙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전통 시대에 한강의 결빙을 누구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했고, 궁궐 내에도 두 곳에 내빙고(內氷庫)를 설치해 왕실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공급했다. 정조 때에는 얼음 운반의 폐단을 줄이고자 내빙고를 양화진으로 옮겼다. 동빙고는 한강변 두뭇개,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고,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기슭에 있었다.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는 ‘빙고(氷庫)’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빙고가 두뭇개에 있다. 제사에 쓰는 얼음을 바친다. 서빙고는 둔지산에 있다. 궁 안에서 쓰이고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할 얼음을 공급한다. 이들 빙고는 개국 초부터 설치돼 얼음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동빙고에 옥호루(玉壺樓)가 있는데 경치가 뛰어나다”고 하여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서빙고 얼음은 관리들에게 공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인 음력 5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종친과 고위 관료, 퇴직 관리, 활인서의 병자, 의금부의 죄수들에게까지 나눠 줬다.

얼음을 뜨는 것은 한양 안 5부의 백성들에게 부과된 국역(國役)으로, 이를 장빙역(藏氷役)이라 했다. 얼음은 네 치 두께로 언 후에야 뜨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난지도 등지에서 갈대를 가져다가 빙고의 사방을 덮고 둘러쳐 냉장 기능을 강화했다. 얼음을 뜰 때에는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고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고 일이 끝나면 포상이 따랐다. ‘세종실록’에는 장빙군(藏氷裙)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이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얼음을 빙고에서 처음 꺼내는 음력 2월 춘분에는 개빙제(開氷祭)를 열었다. 얼음은 3월 초부터 출하하기 시작해 10월 상강(霜降) 때 그해의 공급을 마감했다고 한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사한단(司寒壇)에서 추위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를 올렸는데, 영조는 기한제 이후 얼음이 꽁꽁 얼자 제관(祭官)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나라에서 설치한 빙고가 있었지만, 어물전이나 정육점 같은 곳이나 빙어선(氷漁船) 등에 활용되는 얼음이 크게 늘어나면서 공급이 부족하게 됐다. 18세기에 이르면 사적으로 얼음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돼 한강 근처에만 30여 개소의 빙고가 설치될 정도였다. 얼어붙은 한강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을 채취하는 모습은 이제 사라졌지만 1970년대까지 얼음이 채취됐음은 빛바랜 흑백 사진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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