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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갤러리] 아들도 부끄러워한 전위예술가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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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08 01:07:59 수정 : 2017-04-11 11: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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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기 ‘무제’
(79×104㎝, 3월12일까지 갤러리 현대)
아들은 부끄러웠다. 자랑스레 친구를 이끌고 아버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을 찾았지만 그림은 없고 돌무더기만 덩그러니 쌓여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아들은 친구의 손을 급히 이끌어 전시장에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을까. 박현기(1942~2000) 작가의 장남 성우씨가 그랬다. 1981년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친구에게 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결행’한 일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당시 전시가 열리고 있었던 대구 수화랑 전시장에는 강가에서 주운 돌들이 무더기를 이뤘고, 그 중앙에 마이크가 꽂혀 있었다. 전시장 바닥이 나무마루라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스란히 마이크에 전달되도록 한 설치작품이다. 요즘에도 현대미술 문외한들에겐 여전히 별스러운 풍경이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는 한국 현대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현기도 그 공간에서 활동한 작가다. 한국 비디오아트 선구자답게 모니터를 나무, 돌, 대리석 등과 함께 설치하고 특정 주제를 가진 영상을 중첩시켜 작품을 풀어갔다.

사실상 박현기의 작품은 만다라의 현대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만다라는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眞髓)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의 하나다. 만다라의 본래 의미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박선기는 그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박현기의 20년 전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인 밀교의 만다라 불화 이미지와 포르노그래피 속 남녀 간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결합시킨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30분간 흐른다. 여성의 신음까지 더해져 상당히 파격적이다. 언뜻 보면 구더기들이 꾸물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이 보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작가는 컬러풀한 오일스틱 드로잉도 남겼다. 인테리어 일로 생계를 꾸리가면서 작업의 고삐만큼은 놓지 않으려 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시각각의 상념들을 잡아두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박현기는 대구화단에서 이강소 최병소 등과 맹렬하게 현대미술 실험을 하던 중 위암으로 쉰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백남준과는 또 다른 비디오아트의 발걸움이 아쉽게도 멈춰버린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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