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한국혼 전파했던 충칭국제방송국

관련이슈 류영현기자의 역사항쟁지 다시보기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02-16 21:07:15 수정 : 2017-04-11 13:15:0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주하면서부터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1940년 11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김학규(1900∼1967)는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관 당면한 독립운동 방향에 대한 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충칭에 있는 충칭국제방송국의 전파를 이용했다. 이어 1942년 12월 총사령부 부사령 김원봉도 이 방송을 통해 한국광복군 참여를 독려했다.

3·1절이나 국치일, 한국광복군 창설기념일 등에 선언문·선포문·성명서 등도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이는 국내외 동포들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책과 성명 등을 전달하는 유일한 대중 선전활동 매체였다.


중국 충칭시 위중구 중산로에 있는 옛 충칭국제방송국과 김학규 선생(작은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파를 빌려 준 이곳은 충칭인민광파전태로 이름이 바뀌었다.
독립기념관 제공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선전부를 신설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 대적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1944년 4월 2일부터 정기적으로 방송선전활동을 펼쳤다. 한국어방송은 매주 월·수·금 오후 9시50분부터 10분 동안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정요원의 육성(肉聲)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와 전쟁 상황 등을 직접 알렸다. 이로 인해 대내외에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투쟁 방향을 제시하는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특히 충칭국제방송국에서는 3·1절 기념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첫방송을 내보낸 백파(白波) 김학규 선생은 평남 평원 출신이다. 그는 열 살 때인 1910년 구국항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이갑 선생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의 소대장을 거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혁명당을 대표하여 한국독립당 대표와 협의, 당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곽단체 조직 기능을 강화하도록 노력했다. 또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항일항쟁의 선봉에 서서 군을 지휘했다. 광복 이후에는 중국에 있는 한인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며 1만2000명이 넘는 한인들을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시키도록 힘썼다. 그는 독립운동 중에 광복군의 큰언니로 불리는 오광심과 결혼했다. 이 부부는 나중에 나란히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현충원에 함께 잠들어 있다.

류영현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