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제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습니다.”
손 회장은 10년 전쯤부터 인재 양성에 필요한 재단 설립을 고민해왔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일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제자들 덕에 쉽게 번 돈, 언젠가는 갚아야지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창업 지원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부채의식’은 뭘까. 손 회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학생들에게 ‘공부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고 강조했는데 지금은 명문대를 나와도 사회적 역할은커녕 취업하기도 힘들다”며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지고 제자·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은 “창의적 능력과 아이디어는 있지만 돈이 없어 도전조차 못하는 젊은 세대의 창업을 돕기 위해 윤민창의투자재단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제원 기자 |
손 회장은 당시 졸업식장에서 접한 ‘어쩌다가 커피장사를’ 하는 투의 교수와 선후배, 지인들 눈빛을 잊지 못한다. “제 신조 중 하나가 ‘거침없이 살자’예요. 사농공상(士農工商) 서열이 유효한 봉건사회도 아닌데, ‘서울대생이 커피나 팔고 있다’며 한심한 듯 쳐다보는 게 부당하다고 느꼈죠. 지금도 그래요. 국가경제 기여도에 걸맞게 사회적 위상 또한 ‘상공농사’가 돼야 한다고 봐요.”
기업인이 현대사회의 리더라는 소신과 별개로 그날 일은 손 회장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전 하숙집 아주머니 소개로 강남에서 고액과외를 시작한 것이다. 반에서 20등 하던 아이를 5개월 만에 전교 15등으로 끌어올렸다. 입소문이 나면서 30대 초반 월 4000만∼5000만원을 버는 과외선생이 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찝찝함이 남았다. 자신이 부잣집 아이들 성적을 올려 사회 불평등을 심화하는 주범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회에 도움을 주는 장사꾼이 되자고 해서 시작한 게 학원 강의였다. 비교적 싼값에 보다 많은 학생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1997년 ‘손사탐’(손선생의 사회탐구) 강의를 시작했는데, 첫 달 집에 들고 간 돈이 달랑 32만원이었다. 아내의 “미쳐도 제대로 미쳤고만” 핀잔에도 어제보다는 나은 인생이라고 확신했다. 수입도 늘었다. 대중강의를 시작한 지 1년 뒤쯤 월소득이 4억원이 넘는 초특급 강사가 됐다.
알짜로 돈을 벌고 있는데 또 한 번의 고민이 찾아왔다. 한 학부모가 밤늦게 찾아와 감사인사를 하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 덕에 아파트 값이 6개월 새 3억원이나 뛰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강의가 사교육 광풍과 부동산 투기를 불렀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2000년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메가스터디를 세웠다.
손 회장은 “재작년부턴가, 이렇게 살다 죽으면 지난 인생이 참 허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때 작성한 버킷리스트 중 첫 번째가 바로 윤민재단”이라고 말했다. 윤민재단으로 혁신적인 인재들이 꿈을 키우고 사회 발전에도 보탬이 된다면 천당에 있는 딸에게도 떳떳할 것 같았다.
“투자하는 스타트업 50개 중 49개가 실패해도 무방합니다. 시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거든요. 아무것도 안 하면 계속 ‘0’이지만 하나라도 도전하면 나중에 10이 되고, 100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도전해야 뭐라도 바뀌는 법입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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