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아시안게임에선 유독 설상종목의 선전이 눈부시다. 대회 첫 2관왕을 차지한 스노보드 이상호(22·한체대)와 스키 크로스컨트리 남자 역대 첫 금메달을 따낸 김 마그너스(19) 등 그간 불모지였던 종목에서 낭보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최초’의 짜릿함보다 은퇴를 바라보는 베테랑의 ‘노을빛 투혼’이 진한 여운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채원의 포기하지 않는 질주가 그렇다.
이채원은 평창 대화중학교 1학년 때 스키를 처음 잡아 선수 경력만 20년이 훌쩍 넘는다. 2002년 솔트레이크 대회부터 4회 연속 동계올림픽 대표로 나선 데다 그간 따낸 국내 동계체전 금메달만 67개에 달한다. 국제대회에서도 간간이 깜짝 활약을 펼쳤다. 이채원은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동계아시안게임 크로스컨트리 프리 10㎞에서 한국 사상 최초 크로스컨트리 금메달을 따냈다. 지난해 핀란드 국제스키연맹(FIS) 레이스 프리 10㎞에서도 우승하며 노익장을 한껏 뽐냈다.
그러나 이채원의 화려한 이력에는 남모를 아픔이 있다. 스키 크로스컨트리는 표고차 200m 안팎의 평지·오르막·내리막길로 이뤄진 코스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해 ‘설원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극한의 경기다. 강인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이채원은 매일 6시간 훈련의 강행군을 거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갖가지 종류의 비타민을 달고 살아야만 고된 훈련을 버틸 수 있다. 체력이 유독 달리는 날에는 종종 이명 현상도 찾아와 그를 괴롭힌다. 국내 스키장이 전체 17개밖에 되지 않는 열악한 훈련 환경도 이겨내야 한다.
무엇보다 이채원은 경기 도중 힘이 부칠 때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장은서(4)양이 아른거려 당장이라도 스키 폴을 놓고 딸에게로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그의 딸은 이채원이 해외 전지훈련에 나가있는 동안 영상통화로 엄마를 응원해주며 힘을 불어넣어 준다. 이채원은 아직 한창 엄마를 찾을 나이의 어린 딸을 가까이서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법하다. 자신의 훈련 준비를 도맡고 있는 남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크다.
하지만 이채원은 아직 국가대표 명찰을 뗄 수 없는 상황이다. 크로스컨트리의 간판 선수인 그가 은퇴한다면 한국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기대를 걸 만한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평창에서 20위권 안에 들어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남기고 크로스컨트리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 목표다. 이채원은 “평창에서 선수 생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비록 이채원이 평창에서 화려한 메달을 따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든 그의 지치지 않는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안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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