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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오렌지 껍질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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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27 21:52:18 수정 : 2017-04-11 14: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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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빈 껍질된 ‘세일즈맨의 죽음’
가련한 월부인생들에도 희망이 오길
막이 오르면 곧 허물어질 듯 낡아빠진 집이 희미하게 무대에 떠오른다. 거대한 콘크리트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짓눌린 듯 을씨년스럽다. 이 집으로 아주 무거운 가방을 들고 초로의 남자가 귀가한다. 삶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무거운 가방에 눌려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오랜 삶의 경쟁에 찌든 피로감이 역력하다. 금세 무너져 내릴 듯 흐느적거린다. 세일즈맨 윌리 로먼, 어쩌면 ‘Low+man’으로 읽힐 수 있는 로먼은 누가 보더라도 ‘낮은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욕망하는 기계’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비인간적 힘에 의해 마모되는 부속품, 혹은 무기력한 하층민의 전형처럼 보인다. 바로 아서 밀러의 1949년 퓰리처상 수상작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이다.

63세의 늙은 외판원인 그는 36년간 회사에서 일했다. 젊은 시절 그는 부지런히 일해 머잖아 세일즈맨으로서 성공하고, 비즈니스맨으로도 도약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녔다. 모든 국민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의 국민이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월부로 집 한 채도 마련했다. 월부금이 곧 끝나게 되면 그 집은 온전히 자기 몫이 될 터였다. 그런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그의 가정은 밝은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로먼의 꿈은 현실의 풍파에 시달리면서 점점 희미한 불꽃이었다. 성과급으로 받는 세일즈맨이었기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수입은 점차 감소되고, 그만큼 희망도 축소됐다. 월부 판매를 주로 해왔던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월부 인생’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부금은 늘 주급을 초과했다. 자동차든 냉장고든 첫 월부금을 내는 순간부터 마모되기 시작해 지불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폐품이 돼버리기 일쑤였다. 월부의 악순환! 삶을 ‘폐품 저장소와의 경주’라고 말하는 그의 인생도 폐품처럼 전락하고 있었다. 세일즈 가방의 무게가 힘겨워진 그가 내근을 신청하지만 결과는 해고였다. 36년 동안 회사를 위해 일한 그에게 ‘사업은 사업이다’라고 믿는 사장은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이런 항변도 차라리 무기력한 넋두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오렌지의 속만 까먹고 껍질만 내던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사람이 결국 과일 조각은 아니잖아.”

‘오렌지 속’이 돈이 되지 ‘껍질’은 돈이 될 수 없다는 비정한 경제 논리에 의해 그는 무참히 폐기된 빈 껍질 신세로 전락한다. 꿈이 좌절되고 희망이 소실되는 순간이다. 배신감·비애·울분·피로·절망감으로 늙은 육체는 더 이상 헤어나기 힘든 회한과 광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절망감 속에서 그는 자식들에게 사업자금을 챙겨주려는 의도로 차를 몰아 죽음으로 질주한다. 이 비극적 월부 인생의 종말을 애도하는 부인 린다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제가 오늘 이 집의 마지막 월부금을 치렀는데 그 집에 사실 분이 계시지 않는군요.”

자살 빈도가 높은 한강 다리의 보호 장벽을 높였더니 자살 건수가 줄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가련한 월부 인생들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사회보장 시스템이 더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희망을 견인하는 공정한 경제 시스템에 대한 실천적 비전이 절실하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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