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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 1907∼1974 )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시의 낭송(朗誦)은 낭독(朗讀)과 다르다. 낭송을 한자어로 풀이하면 또랑또랑할 낭(朗), 욀 송(誦)으로 시를 외워서 또랑또랑하게 읊조리는 게 시낭송인 것이다. 시낭독은 텍스트를 보고 또랑또랑하게 읽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낭송, 낭독 구분 없이 그냥 시낭송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시낭송은 텍스트를 외워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시노래, 시와 연극, 시와 무용처럼 텍스트를 재창조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을 게다.

낭송, 낭독 구분 없이 목적에 부응하는 예로 신석정의 작품만큼 좋은 시가 없을 듯싶다.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서정뿐만 아니라 ‘하지 않으시렵니까?’ 등의 청유형 서술어는 청자로 하여금 묘한 유토피아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필자는 부안의 신석정 생가를 방문한 다음, 아름다운 모항이 내려다보이는 ‘호랑가시나무찻집’에서 인용시를 낭독한 적이 있다. 듣고 있던 동행자 3명이 서로 낭독해 보겠다고 해 모두 돌려가며 했던 시가 바로 이 ‘작은 짐승’이다. 그리하여 ‘모항’, ‘호랑가시나무찻집’, ‘작은 짐승’ 이 세 단어로 신석정 시인이 필자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의 목록을 남기게 되었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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