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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내가 잠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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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12 21:12:16 수정 : 2017-04-11 16: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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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1966~)
사전은 책상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간다 소파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제 육체를 구성한 말들에 갇혀 죽어가는 자신을 반성하며 담배를 핀다 내가 잠들면

달력 속의 여자는 밤마다 외출을 한다 죽은 애인을 만나러 묘지로 나간다 무덤을 파헤친다 관뚜껑을 연다 달빛아래 밤늦도록 해골의 그와 함께 춤을 추다 새벽녘 울면서 돌아온다 내가 잠들면

시계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책상과 의자는 싸움을 시작한다 책상의 두개골이 깨지고 의자는 코피를 흘린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의 존재소멸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내가 잠들면

책들은 물고기가 되어 방안 가득 푸른 알을 낳고 양초는 밤새도록 자학하며 시를 쓴다 병든 제 육신을 불태워 춥고 어두운 나의 방을 밝혀준다 계단은 계단에서 고독과 추위에 떨며 아파하고 옥상의 옷들은 빈 껍데기뿐인 자신의 일생과 먼저 죽은 친구들의 생을 생각하며 불면에 시달린다 내가 잠들면

( …… )



시창작 지도를 하다 보면 창의적 발상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면 마치 큰일 날 것처럼 기존을 붙들고 한 치도 안 떨어지려 바들바들 떠는 형국이랄까. 그러면 이런 고정관념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나.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자아분리 연습을 시켜보는 거다. 자신을 나와 내 자아 두 사람으로 분리해 각각 따로 행동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김영남 시인
인용시 ‘내가 잠들면’은 나와 내 자아, 사물과 사물의 자아 이렇게 분리한 상황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내 자신은 방에 잠들어 있는데 내 자아는 잠깨어 있다. 방안의 사물들은 잠들어 있는데 사물들의 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싸우기까지 한다. 하여 잠들지 않은 내 자아가 잠들지 않은 사물들의 자아에 관심을 갖고 이를 묘사하는 게 시의 주 내용이다.

인용시를 쓴 함기석 시인은 이처럼 활유적(活喩的) 어법의 시로 시단에서 주목을 받고 독특한 위치를 확보한다. 자신의 전공인 수학을 시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융합적 상상력의 시인이랄까.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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