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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너른 들판 지키는 부부송, 다정히 봄햇살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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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16 10:00:00 수정 : 2017-03-15 20: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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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의 무대 하동
경남 하동은 산과 들, 강과 바다 등 자연을 이루는 많은 것이 어우러져 교차한다. 특히 세 개의 도를 아우르는 넉넉한 어머니의 산 지리산과 풍요롭고 넉넉한 생명의 젖줄인 어머니의 강 섬진강의 경계다. 또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구분된다. 그곳에 화개장터가 있다.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그곳이다. 배로 바다에서 섬진강에 들어오면 닿는 곳이 화개장터 부근이었다. 남해나 거제, 삼천포 등에서 보부상이 해산물을 가져와 농산물과 지리산의 임산물과 교환해 조선 7대 시장 중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예전 화개장터는 주택단지로 변했다. 지금 화개장터는 여행객이 늘자 최근 조성한 곳이다. 옛 장터의 모습은 없지만, 시장의 북적거림과 왁자지껄은 여전하다. 하동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많은 것이 섞여 있는 공존의 땅이다.

◆현실과 소설의 공존

동학운동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는 하동이다. 박경리 선생이 하동을 ‘토지’의 배경으로 삼았지만,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통영 출신에 진주에서 성장한 그는 ‘토지’의 무대를 경상도로 삼았지만, ‘만석꾼’의 이미지에 맞는 드넓은 토지를 경상도에서 찾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하동의 평사리는 우연히 다가왔다. 딸과 여행을 다니다 만나게 된 곳이 평사리다. 경상도 어느 곳보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인근 섬진강과 지리산이 주는 무게감이 그를 매료시켰을 것이다.
경남 하동 최참판댁에서는 드넓은 평사리 들판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들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나무 두 그루다.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두 그루의 나무를 부부송이라 부른다. 서로 의지한 채 서 있는 모습이 그리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를 보려면 최참판댁으로 가야 한다.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에 소설 속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놨다. 실제 박경리 선생이 소설에서 모델로 한 집은 최참판댁 아래에 있는 조씨 고택이다.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가 머문 별당과 연못을 재현해놨다.

이곳에 재현된 최참판댁 정문을 나오면 드넓은 평사리 들판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들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나무 두 그루다.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두 그루의 나무를 부부송이라 부른다. 서로 의지한 채 서 있는 모습이 그리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작은 호수도 있는데 동정호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을 보고 고향 땅에 있는 호수와 닮았다며 ‘동정호’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최참판댁 별당에서는 다도 체험을 할 수 있다.

최참판댁 안에 들어서면 주인 최치수가 머물던 사랑채에 발길이 먼저 닿는다. 누각에 올라 바라보면 평사리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집 안을 돌다 연못이 있는 별당에 이르게 된다. ‘토지’의 주인공 서희가 거처하던 곳이다. 사랑채와 별당에선 현대판 최치수와 서희를 만날 수 있다.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가 살던 최참판댁은 소설 속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최참판댁의 구조 등을 설명해주고 다도 체험 등을 해주는 이들이다. 최참판댁에서 위로 더 오르면 나오는 한산사로 가면 평사리의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한산사 앞에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법계와 속계의 공존

우리 역사에서 많은 인물이 신선이 됐다. 그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 해동공자 최치원이다. 하동 곳곳엔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쌍계사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때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이 창건했다. 전란으로 소실되기도 했던 쌍계사는 조선 때 중건됐다. 
쌍계사 일주문.
하지만 신라 때부터 긴 세월을 이겨내고 남아 있는 유적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 부도비다. 최치원이 글을 지었다. 6·25전쟁 때 총탄을 맞은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는 등 깨지고, 마멸이 가 있다. 부도비의 내용은 불교 선종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진감선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최치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 부도비의 글을 최치원이 지었다. 6·25전쟁 때 총탄을 맞은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는 등 깨지고, 마멸이 가 있다.
쌍계사를 찾으면 대웅전 인근의 담벼락을 보고 가자. 꽃담이라 불린다. 쌍계사 재건 시 남은 자재를 활용해 담을 쌓았는데 기와 등으로 꽃 문양을 만들어놔 눈길을 끈다.
쌍계사 대웅전 근처의 꽃담.
쌍계사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오르면 길가에 큰 바위 두 개가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 있다. 바위 양쪽에는 각각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이 직접 새긴 글이다. 특히 이 바위 중 ‘석문’이 새겨진 바위 뒤편을 보면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이 쓴 글이 있다. 쌍계사를 찾아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해방 후 학생들이 이 글 위에 용변을 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석문’이 새겨진 바위 뒤편을 보면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이 쓴 글이 있다. 쌍계사를 찾아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해방 후 학생들이 이 글 위에 용변을 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쌍계사에서 나와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에 이르면 범왕리 푸조나무가 있다. 최치원이 땅에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근데 나무의 수령은 500여년밖에 안 된다. 최치원이 1000여년 전에 인물인데 시기가 맞지 않는다. 지금의 푸조나무는 최치원 푸조나무의 손자뻘 나무라는 얘기가 하나 더 덧붙여졌다.
최치원이 속세에서 마지막으로 귀를 씻은 바위 세이암. 최치원은 여기서 귀를 씻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었다.

푸조나무 건너편으로는 세이암이 있다. 최치원이 속세에서 마지막으로 귀를 씻은 바위다. 귀를 씻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간 그는 속세와 연을 끊는다. 그래서 그의 연표를 보면 출생연도(857년)는 있지만 사망연도는 ‘?’로 표기돼 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셈이다.

하동=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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