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사연 많은 죽음들을 향해 유장한 애도

입력 : 2017-03-16 21:11:24 수정 : 2017-03-16 21:11:2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임철우 소설집 ‘연대기, 괴물’ 임철우(63)의 다섯 번째 소설집 ‘연대기, 괴물’(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은 유장한 애도의 서로 읽힌다. 모두 죽은 이들이 등장하거니와 살아 있더라도 자의로 죽을 예정이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그들 죽음의 연원을 파고들어가 지금 이곳의 삶을 되비추기도 하고, 곡절 많은 사랑과 한의 기억을 강물 같은 서사로 이어간다. 
오랜만에 소설집을 펴낸 임철우. 그는 “기억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기억은 이미 죽은 이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라는 수전 손택의 글을 인용하며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을 강조했다.

3년 전 뇌 안에서 종양 덩어리가 뒤늦게 발견돼 세상을 떠난 아내가 노인에게 자주 찾아온다. 죽은 아내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들의 아들은 외환위기 때 사업에 실패하고 부모의 아파트까지 들어먹고 난 뒤 노숙자 생활을 하다 덤프트럭에 치여 죽었다. 아내의 상심을 말해 무엇할까. 아내가 죽은 후 “등허리 휜 늙은 초식동물처럼 과거의 기억들만 되새김질하며” 지내던 노인도 역시 늙어 죽음을 기다리는 반려견 ‘머루’를 안락사시킨 뒤 죽음을 향해 간다. 첫머리에 배치한 이 단편 ‘흔적’의 죽음이 다분히 개인적인 맥락이라면, 이어지는 표제작 ‘연대기, 괴물’의 죽음은 공동체의 질곡으로 파생된 죽음들이다.

60대 노숙자 송달규가 지하철에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노인의 죽음의 뿌리를 찾아 그 연대기를 밝히는 내용이 축이다. 송달규는 한마디로 태생부터가 허깨비 같은 존재였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새신랑은 한밤중에 배를 타고 이웃 섬에서 건너와 처갓집 뒤란에 숨어 있다가, 서북청년단 몽둥이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됐다. 그 청년이 어머니의 첫 남편이었다. 어머니는 몽둥이패 대장 갈고리에게 추행을 당해 사생아를 낳았고, 그 사생아는 죽은 남의 집 자식 이름으로 호적에 올라 달규가 되었다. 어머니의 첫 남편이 숨어 있던 토굴의 검은 아가리가 달규의 생애에 괴물처럼 따라다닌다.

감금시설에서 20여년간 살다가 나왔던 달규가 투신자살을 한 그날도 지하철 검은 터널에서 괴물이 뛰쳐나왔다. 달규는 자신의 생부이자 괴물인 ‘갈고리’를 처단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달규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해 양민을 수류탄으로 죽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전철을 타고 오다 안산에 들러 세월호의 죽음도 상기한다. 남광주역 골목길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양삼식, 성장기에 달규를 거두어줬던 그이는 광주항쟁 때 세탁소 안으로 도망쳐들어온 청년 두 명을 숨겨주었다가 공수부대 병사의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이 망가졌다. 6·25전쟁, 베트남전쟁, 광주항쟁, 세월호로 이어지는 반복되는 비극, 그 안에서 괴물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출몰하는 존재이다. 달규가 지하철로 투신하는 배경을 밝힌 마지막 대목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의 고갱이가 있다.

“마침내 터널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검은 털, 핏발 선 두 눈알, 나팔 모양의 귀, 늑대의 이빨, 옆으로 죽 찢어진 입… 아아, 마침내 그는 놈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것은 그의 아비였고, 또한 바로 그 자신이었다. 온몸으로 피 냄새를 풍기는, 세상 모든 악의 형상이었다. …그는 칼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으아아, 미친 듯 고함을 지르며 놈을 향해 튀어나갔다.” 

괴물은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괴물을 직시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야기 집-단추눈아짐’은 임철우가 오랫동안 살았던 보길도 집필실의 실제 체험을 담은 이야기다. 사연 많은 촌부와 어울려 지내며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소설로 나왔다. 눈이 단추만 한, 스물두 살에 후처로 들어와 전처소생 어린 남매를 키워낸 그 늙은 ‘아짐’은 “오메, 어째사 쓸까이. 날마다 밤새도록 그렇게 골을 굴리다가는 몸이 어찌 견뎌나겄소?”라며 만날 작가를 안쓰러워했다. 아우라지 동강에서 서울까지 목재를 엮어 운송했던 뗏목꾼 이야기를 담은 ‘물 위의 생’은 서사시처럼, 혹은 활자로 연주하는 뮤지컬 같은 서러운 이야기로 흐른다. “저마다의 생 또한 그렇게 다른 물길을 따라 흔적 없이 흘러갈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원댁, 귀례, 수희로 이어지는 여성 3대와 필구와 칠두라는 두 사내의 이야기가 직조된다.

임철우는 “왜 늘 기억이니 상처니 하는 무거운 이야기만 하느냐 혹시 누가 물어온다면, 나로서는 그저 어떤 피치 못할 절실함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달리 대답할 게 없다”면서 “아픔에 과도하게 예민하면서도, 망각엔 또 너무 서툰 탓인가, 아니면 애초에 세상의 어둠과 난폭함을 유독 견뎌내지 못하는 허약 체질로 태어난 탓인가”라고 자문한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