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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며 사냥을 했다. 그러다가 말이 거꾸러져서 왕이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태종의 일화다. 무소불위한 권력을 행사하며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도 위급한 상황에서 사관부터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관은 왕이 말에서 떨어진 사실뿐 아니라 왕이 한 말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사관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니 ‘실록’은 그 말이 뜻하는 것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이었다. 유네스코도 이를 인정해 ‘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이처럼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국가 차원에서 ‘실록’ 외에 ‘승정원일기’, 각종 왕실·국가 행사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한 ‘의궤’ 등을 펴냈고 수많은 선비들이 개인 문집 등 숱한 기록을 남겼다. 기록문화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이 들어선 뒤에는 대통령 관련 기록이 제대로 보관되지 않거나 개인 수중으로 넘어가는 폐단이 많았다. 1999년 공공기록물관리법에 이어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한 이유다. 법에 따르면 대통령기록물이란 ‘대통령 직무수행과 관련해 대통령과 보좌기관·자문기관·경호기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생산·접수해 보유하고 있는 기록물 및 물품’이다.

대통령기록관이 직원들을 청와대로 파견해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기록물을 넘겨받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통령 파면 시 대통령기록물 지정·이관에 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혼선이 빚어진다. 비공개 대통령기록물로 분류되면 최장 30년간 봉인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된 기록물도 포함될 것이다.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나 관할 고등법원장의 영장 발부로 제한적 열람이 가능하지만, 검찰 수사 관련 문건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청와대의 대통령기록물 유출·폐기 여부를 감시할 방법도 없다. 우리는 국정농단 사태에서 대통령 관련 기록이 얼마나 함부로 다뤄졌는지 잘 알고 있다. 대통령기록물의 신뢰 위기를 낳지 않을까 우려된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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