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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한 명 한 명과 소통한 아이크 리더십

입력 : 2017-03-19 13:23:10 수정 : 2017-03-19 20: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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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앞두고 최전선 달려가 / 병사들과 대화하며 격려… 전쟁 승리 이끌어 / 미군 최고 리더로 꼽히는 아이젠하워 평전 / 루저였던 아이크, 전쟁영웅·대통령 되기까지 / 소통·공감·통합의 리더십과 삶 담아
존 우코비츠 지음/박희성 옮김/플래닛미디어
아이젠하워/존 우코비츠 지음/박희성 옮김/플래닛미디어


1944년 6월 6일 새벽녁의 노르망디 해안. 미 101공수사단 502연대 병사 1000여명은 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 몇 시간 내에 이들 중 70% 이상이 전사할 운명 앞에 있었다. 23번기 강하 조장 스트로벨 중위에게 병사 한 명이 소리쳤다.

“아이젠하워(애칭 아이크)가 여기 왔다!” 아이크는 운전병과 참모 한 명만 데리고 최전선에 왔다. 런던의 전선지휘소에서 날아온 참이었다. 훗날 종군 기자는 이렇게 전했다. “(상륙작전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만나러 온 ‘아이크’를 보고 미친 듯 고함치며 환호했다.” 저격병이 도사리는 위험천만한 돌격선이었다. 그는 장병을 모아놓고 연설하지 않았다. 대신 직접 병사 한 명 한 명을 만나러 장병들을 불러 모았다. 한 병사는 외쳤다. “아이크는 내 이름과 고향을 물었다.” 아이크의 물음에 “미시간”이라고 답하자 아이크는 중얼거렸다. “미시간이라… 낚시하기 좋은 곳이지…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네. 아주 좋은 곳이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작전계획을 숙지했는지 꼼꼼히 챙겼다.

어느 부사관이 말했다. “젠장,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장군님,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독일 저격병입니다.”

아이젠하워 연합군총사령관이 1944년 6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해 돌격명령을 기다리는 미 101공수사단 병사들과 담소하고 있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한 병사가 끼어들며 외쳤다. “보아라, 히틀러, 우리가 여기에 왔다!” 총사령관 아이크는 미소를 지었고, 죽음과 공포에 질렸을 병사들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병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격전을 앞둔 부대원들과 편안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국 종군기자 거론위 로스(Goronwy Ross)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아이크는 대원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과 농담을 했으며, 항상 그들의 고향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아이크는 저격병을 무시하는 듯 전선 여기저기에 옮겨 다녔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의 평전에 나온 사례 한 토막이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총책임자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 존 우코비츠는 최근 펴낸 ‘아이젠하워 평전’을 통해 아이크를 미군 사상 최고의 리더로 꼽았다. 아래 위를 막론하고 말이 통하는, 소통과 통합의 리더로 평가했다. 아이크의 군 이력은 웨스트포인트 동기들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군 핵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머물렀다. 총사령관직에 오르기까지 후방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장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군 경력을 쌓고 있는 동기생들에 뒤처졌다. 포화 속에 있어본 경험이 없었고, 비 내리는 프랑스의 진흙탕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그는 “전투 기회를 거부당한 자는 전쟁이 끝나면 육군을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보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아이크를 눈여겨본 것은 맥아더 장군이었다. 맥아더 역시 아웃사이더였다. 기회를 잡자 출세길이 열린 경우는 아이크와 비슷했다. 말하자면 그는 ‘루저’ 출신이었다.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아이크는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답지 않게 겸손했고, 병사들의 어려움과 고충을 누구보다 공감하며 그들과 소통했다. 이런 그를 만든 계기는 루저의 경험이 있었고 인고의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생사가 갈리는 전투현장에서 미·영국군 장교들이 한 팀이 되는 데 진력했다.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패튼, 오만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몽고메리 등 개성 강한 지휘관들의 경쟁과 충돌을 중재하면서 승리를 이끌어낸 통합과 중재의 귀재였다.

6·25한국전쟁의 종식은 그의 업적이었다. 하지만 공과를 동시에 얻었다. 일명 ‘메카시 광풍’을 막지 못한 책임이 그것이다. 물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불거진 사건이었다.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지프 R 매카시는 정부 내 공산주의자 색출에 열을 올렸다. ‘미국판 빨갱이 색출’사건이었다. 존경받는 군인 조지 마셜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야심가인 매카시의 책략을 알면서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훗날 아들 아이젠하워 존은 “아버지는 마셜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아이젠하워는 훌륭한 군 동료를 배신한 셈이었다. 매카시를 제지하지 못한 것은 결국 국가에 손해를 끼친 꼴이었다. 혼란기 국가지도자의 첫째 덕목의 본을 보여준 인물이 아이젠하워라고 옮긴이는 전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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