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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독일의 항일거점‘고려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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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3 21:37:03 수정 : 2017-03-23 21: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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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 1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유럽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가 설립됐다. 유학생들이 설립목적에서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 활동을 주관한다고 명시했다.

당시 독일에 거주하는 한인은 민간인 55명, 유학생 10개 대학 33명으로 모두 88명에 불과했다.

유덕고려학우회(당시 독일을 덕국이라 했으니 ‘유덕’은 독일유학을 뜻한다)의 사무실은 칸트 슈트라세 122번지에 두었다. 사무실은 훔볼트대학에서 서남쪽으로 6km가량 떨어진 대로변에 있었다. 이곳에서 남동쪽 1.8km 지점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이극로 거주지가 있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첫 간사장에 김갑수(1894∼1938)가 선임됐다. 서무는 윤건중이 맡았다. 2년 후인 1923년에는 이극로와 김준연 등이 물려받았다. 그리고 1924년에는 서무에 이극로, 회계에 김필수가 뽑혔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한인 유학생은 1924년 5월에 58명, 1925년 4월경에는 52~53명 정도였다.


유럽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 사무실이 있었던 독일 베를린 카트 슈트라세 122번지 일대.
유덕고려학우회가 있었던 지금의 건물은 수년 전 리모델링한 것이다. 이 지상 5층 건물의 1층은 가게로, 2층부터 5층까지는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다. 1층 입구의 왼쪽에는 카지노가, 오른쪽엔 태국식품점이 영업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ㅁ’의 구조로 가운데 정원이 있고, 층마다 사방으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유덕고려학우회 조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김갑수는 충남 서천 출신이다. 그는 1915년 월남 이상재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난양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서병호·조동호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여운형이 이끄는 전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 상하이에서 조선인유학생회 조직을 주도했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으나 군산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했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다,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동흥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27년 다시 귀국해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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