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1호 사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군인이나 노동당원, 기업소 근로자들에게는 최고 지도자의 ‘혁명활동’에 동참한다는 증명서 역할을 한다. 진급이나 보직 배치 과정에서 혜택을 기대할 수도 있다. 1호 사진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촬영과 배포 등을 관리한다. 선전선동부의 수장은 ‘북한의 괴벨스’라 불리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북한의 선전선동을 책임지고 있는 김기남이다. 김기남을 필두로 하는 선전선동부는 선전에서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이미지 조작의 최고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최고 지도자의 현지지도 현장에서 촬영할 모습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철저한 검열을 거쳐 관영 매체에 내보낸다.
지난해 3월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된 김정은의 핵폭발 장치 현지지도 모습. 핵탄두로 추정되는 물체를 앞에 놓고 김정은이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노동신문 |
◆ 사진으로 핵 억제력 유지하는 김정은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직후 북한의 1호 사진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외부 세계에 제공된다. 특히 핵, 미사일 관련 1호 사진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다. 김정은은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인 대량살상무기(WMD)를 1호 사진에 포함시켜 국내외에 다양한 메시지를 보낸다.
핵보유국들은 일반적으로 핵실험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핵무기나 관련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다. 핵무기를 지하 무기고 깊숙한 곳에 보관한 채 “핵무기로 적을 선제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핵탄두를 탑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시험발사를 제외하면 대중의 눈에 띠지 않게 한다.
지난 19일 공개된 대출력 고체 엔진 지상분출시험 직후 김정은의 모습. 김정은의 얼굴 양 옆으로 로켓 보조엔진이 눈에 띤다. 북한은 이 사진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단 추진체 완성이 막바지라는 메시지를 외부세계에 전달했다. 노동신문 |
이 사진에는 북한의 핵 억제력과 미사일 기술 수준을 과시하는 정교한 계산이 깔려있다. 북한은 지난해 9월 대출력 로켓 엔진 시험을 공개하면서 80t의 중량을 밀어올릴 수 있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2012년 장거리 미사일 은하 3호 발사 당시 북한은 3t 중량을 밀어올릴 수 있는 보조엔진 4기를 장착했다. 은하 3호처럼 주엔진과 보조엔진을 각각 4개씩 묶을 경우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 제작이 가능하다. 주엔진 2개와 보조엔진 4개를 사용해도 미국 서부 지역을 사거리에 넣을 수 있다. 엔진을 배경으로 찍은 1호 사진 한 장을 통해 ‘미 본토를 공격할 ICBM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셈이다.
지난해 7월 20일 공개된 김정은의 노동, 스커드 미사일 발사 훈련 참관 모습. 김정은 앞에 놓인 지도에는 미사일의 실제 비행궤적이 실선으로, 훈련에서 염두에 두었던 궤적은 곡선 모양의 점선으로 그러졌다. 이 점선은 부산 근에서 끝났다. 한반도 전역을 공격할 수 있다는 김정은의 경고 메시지인 셈이다. 노동신문 |
◆ 뒷모습 보여주는 김정은…“나와 함께 가자”
김정은 시대 1호 사진의 또다른 특징은 탄도미사일 발사를 바라보는 김정은의 뒷모습이 찍힌다는 점이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아버지인 김정일과 달리 후계자 수업 기간이 짧은 김정은은 자신이 그리는 북한의 미래를 주민들이 함께하도록 이끄는데 필요한 카리스마나 업적이 부족하다. 이를 단기간에 보완하는 것이 바로 사진을 통한 선전선동이다. 김정일이 물려준 유산 중 가장 효과적인 통치 수단인 선전선동을 김정은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2015년 5월 노동신문에 공개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사출시험을 지켜보는 김정은의 모습은 주민들에게 강한 리더십을 어필하는 선전선동술이다. 노동신문 |
지난해 8월 촬영된 김정은의 모습. 하늘로 솟아오르는 탄도미사일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을 통해 주민들은 최고 지도자와 같은 시선에서 미사일을 바라보게 된다. 노동신문 |
지난 19일 공개된 사진으로 대출력 고체 엔진 지상분출시험 직후 김정은이 과학기술자를 업어주고 있는 모습이다. 파격적인 어부바 자세를 취함으로서 과학기술자 우대 정책을 재확인하고 애민 이미지를 심어주는 선전선동술을 보여준다. 조선중앙TV |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나라라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게 북한은 외부에 많은 사진들을 공개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1호 사진이 공개되는 횟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항일 운동’이라는 자산을 가진 김일성과 오랜 후계자 수업으로 권력기반을 다진 김정일과 달리 북한에서 내세울만한 요소가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핵, 탄도미사일과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이미지 조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수십년 동안 선전선동을 한 덕분에 사진을 통한 이미지 조작에서는 스탈린 시절 소련 공산당을 능가하는 기술을 확보한 북한이지만 선전선동의 효과도 한계가 있다. 선전 효과가 오랜 기간 지속되려면 실질적인 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 성장이나 주민생활 향상 등의 치적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북한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는 군사분야다. 평양에 건설중인 여명거리가 완공되면 북한은 새로운 선전선동 소재를 찾아나설 것이다.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핵과 탄도미사일을 활용해 주민들을 세뇌시킬 이미지 조작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김정은이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한 탄도미사일을 이용한 정치술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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