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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무슨 뜻일까"…사진에 숨겨진 北 미사일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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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5 11:10:00 수정 : 2017-03-25 10: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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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사진. 북한 주민들이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등 관영 매체의 보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최고 지도자의 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한에서 1호 사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군인이나 노동당원, 기업소 근로자들에게는 최고 지도자의 ‘혁명활동’에 동참한다는 증명서 역할을 한다. 진급이나 보직 배치 과정에서 혜택을 기대할 수도 있다. 1호 사진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촬영과 배포 등을 관리한다. 선전선동부의 수장은 ‘북한의 괴벨스’라 불리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북한의 선전선동을 책임지고 있는 김기남이다. 김기남을 필두로 하는 선전선동부는 선전에서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이미지 조작의 최고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최고 지도자의 현지지도 현장에서 촬영할 모습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철저한 검열을 거쳐 관영 매체에 내보낸다. 

지난해 3월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된 김정은의 핵폭발 장치 현지지도 모습. 핵탄두로 추정되는 물체를 앞에 놓고 김정은이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노동신문
북한 매체에 등장한 1호 사진을 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조선중앙통신이 연합뉴스나 외국통신사에 보내는 사진을 열람하는 것, 노동신문이 홈페이지에 올린 지면 PDF에서 사진을 잘라내 저장하는 것, 조선중앙TV 화면을 캡쳐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지만 접근이 쉽지 않다. PDF나 TV 화면 캡쳐는 해상도가 떨어져 확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정은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확인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 사진으로 핵 억제력 유지하는 김정은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직후 북한의 1호 사진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외부 세계에 제공된다. 특히 핵, 미사일 관련 1호 사진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다. 김정은은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인 대량살상무기(WMD)를 1호 사진에 포함시켜 국내외에 다양한 메시지를 보낸다.

핵보유국들은 일반적으로 핵실험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핵무기나 관련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다. 핵무기를 지하 무기고 깊숙한 곳에 보관한 채 “핵무기로 적을 선제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핵탄두를 탑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시험발사를 제외하면 대중의 눈에 띠지 않게 한다.

지난 19일 공개된 대출력 고체 엔진 지상분출시험 직후 김정은의 모습. 김정은의 얼굴 양 옆으로 로켓 보조엔진이 눈에 띤다. 북한은 이 사진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단 추진체 완성이 막바지라는 메시지를 외부세계에 전달했다. 노동신문
반면 북한은 다르다. 김정은이 등장하는 1호 사진에 탄도미사일과 핵무기 관련 장비들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지난 19일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전날 실시된 대출력 로켓 엔진 지상분출시험에서 김정은이 리병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김정식 당 군수공업부 부부장 등 수행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진을 공개했다. 김정은 뒤에는 시험에 사용된 엔진이 있었는데, 주엔진 옆에 장착된 보조엔진이 뚜렷하게 식별됐다. 지난해 9월 시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보조엔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북한은 김정은을 보조엔진 사이에 위치시키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 사진에는 북한의 핵 억제력과 미사일 기술 수준을 과시하는 정교한 계산이 깔려있다. 북한은 지난해 9월 대출력 로켓 엔진 시험을 공개하면서 80t의 중량을 밀어올릴 수 있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2012년 장거리 미사일 은하 3호 발사 당시 북한은 3t 중량을 밀어올릴 수 있는 보조엔진 4기를 장착했다. 은하 3호처럼 주엔진과 보조엔진을 각각 4개씩 묶을 경우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 제작이 가능하다. 주엔진 2개와 보조엔진 4개를 사용해도 미국 서부 지역을 사거리에 넣을 수 있다. 엔진을 배경으로 찍은 1호 사진 한 장을 통해 ‘미 본토를 공격할 ICBM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셈이다.

지난해 7월 20일 공개된 김정은의 노동, 스커드 미사일 발사 훈련 참관 모습. 김정은 앞에 놓인 지도에는 미사일의 실제 비행궤적이 실선으로, 훈련에서 염두에 두었던 궤적은 곡선 모양의 점선으로 그러졌다. 이 점선은 부산 근에서 끝났다. 한반도 전역을 공격할 수 있다는 김정은의 경고 메시지인 셈이다. 노동신문
지난해 7월 20일 공개된 김정은의 노동, 스커드 미사일 발사 훈련 참관 사진은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겨냥했다. 하루 전날인 19일 실시됐던 이 훈련에서 김정은이 앉아있던 의자 앞에는 훈련 지도가 놓여있다. 지도에는 동해상으로 날아가는 미사일의 예상 궤적과 함께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파란색 곡선이 그려져 있다. 이 곡선은 부산으로 추정되는 위치에서 멈췄다. 부산항과 인근의 김해 공항은 한반도 유사시 미군 증원전력이 들어오는 핵심 관문이다. 노동, 스커드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해 부산을 타격하면 미군 증원전력이 들어오는 길이 막힌다. 북한 입장에선 미군 투입을 저지해야 한반도 전면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미군이 들어올 부산항과 김해공항은 북한 탄도미사일의 타격 1순위다. 북한은 이 사진을 통해 미국에 ‘머리 위에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려면 한반도에 오지 말라’는 경고를, 한국에는 ‘한반도 전역이 탄도미사일 사거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 뒷모습 보여주는 김정은…“나와 함께 가자”

김정은 시대 1호 사진의 또다른 특징은 탄도미사일 발사를 바라보는 김정은의 뒷모습이 찍힌다는 점이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아버지인 김정일과 달리 후계자 수업 기간이 짧은 김정은은 자신이 그리는 북한의 미래를 주민들이 함께하도록 이끄는데 필요한 카리스마나 업적이 부족하다. 이를 단기간에 보완하는 것이 바로 사진을 통한 선전선동이다. 김정일이 물려준 유산 중 가장 효과적인 통치 수단인 선전선동을 김정은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2015년 5월 노동신문에 공개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사출시험을 지켜보는 김정은의 모습은 주민들에게 강한 리더십을 어필하는 선전선동술이다. 노동신문
2015년 5월 노동신문에 공개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 수중사출시험 사진을 보자.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SLBM을 김정은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지켜보고 있다. 김정은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사진은 독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함께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주민들과 김정은이 하나가 되는 단결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손가락을 가리키는 기법을 추가해 김정은에게 리더 이미지를 덧씌웠다. 김정은이 SLBM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부들에게 알림으로서 과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부가적 효과도 있다. 

지난해 8월 촬영된 김정은의 모습. 하늘로 솟아오르는 탄도미사일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을 통해 주민들은 최고 지도자와 같은 시선에서 미사일을 바라보게 된다. 노동신문
지난해 8월 촬영된 1호 사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탄도미사일을 김정은이 올려다보는 이 사진은 미사일처럼 북한을 강하고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은 그의 속내를 짐작하게 한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민들로 하여금 김정은이 강조하는 자강노선과 만리마속도, 강성국가의 길을 자발적으로 걷게 하고픈 마음을 들게 하는 고도의 선전선동술이 숨어있다. 같은해 3월 김정은이 핵탄두 장치를 앞에 놓고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의 히든 카드인 핵무기를 과시하면서 리더십을 보여줘 주민들에게 강한 지도자의 인상을 남기려는 전략이다.

지난 19일 공개된 사진으로 대출력 고체 엔진 지상분출시험 직후 김정은이 과학기술자를 업어주고 있는 모습이다. 파격적인 어부바 자세를 취함으로서 과학기술자 우대 정책을 재확인하고 애민 이미지를 심어주는 선전선동술을 보여준다. 조선중앙TV
지난 19일 공개된 1호 사진은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처음 나타난 파격적인 모습이다. 대출력 로켓 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참관한 김정은은 시험이 성공하자 과학자를 등에 업는 어부바 모습을 선보였다. 2인자로 불리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조차 김정은에게 말을 건넬 때 무릎을 꿇고 입을 손으로 가릴 정도로 권위적인 북한에서 과학자가 김정은의 등에 업힌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최고 존엄이 공개석상에서 누군가를 등에 업는 모습은 김일성, 김정일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지난달 12일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형 시험발사 당시 김정은은 미사일 조립현장을 찾아 국방과학자, 기술자들과 이틀 동안 함께 머물면서 발사를 직접 지도했다. 시험발사가 성공하자 과학자, 기술자, 군인 등을 얼싸안고 축하하며 “모든 것이 100% 우리의 지혜,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에 의하여 개발된 명실공히 주체탄, 주체무기”라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나라라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게 북한은 외부에 많은 사진들을 공개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1호 사진이 공개되는 횟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항일 운동’이라는 자산을 가진 김일성과 오랜 후계자 수업으로 권력기반을 다진 김정일과 달리 북한에서 내세울만한 요소가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핵, 탄도미사일과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이미지 조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수십년 동안 선전선동을 한 덕분에 사진을 통한 이미지 조작에서는 스탈린 시절 소련 공산당을 능가하는 기술을 확보한 북한이지만 선전선동의 효과도 한계가 있다. 선전 효과가 오랜 기간 지속되려면 실질적인 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 성장이나 주민생활 향상 등의 치적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북한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는 군사분야다. 평양에 건설중인 여명거리가 완공되면 북한은 새로운 선전선동 소재를 찾아나설 것이다.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핵과 탄도미사일을 활용해 주민들을 세뇌시킬 이미지 조작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김정은이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한 탄도미사일을 이용한 정치술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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