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

관련이슈 우찬제의 冊읽기 세상읽기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03-27 21:11:40 수정 : 2017-04-11 17:12:3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시인 킬머가 예찬한 나무와의 교감
내 안에 건강한 나무 한 그루를 심자
작가 스스로 “무관심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했던 조르주 페레크의 ‘잠자는 남자’는 무관심이라는 현대성의 주제를 극적으로 환기한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자연이 여기 있어 너를 초대하고 또 너를 사랑한다”는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골짜기들’의 구절을 차용하면서도 “풍경은 네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들과 밭의 평화는 너에게 감동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시골의 침묵은 너를 자극하지도 않고 너를 차분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고 적는다. 이토록 무심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한 2인칭 ‘너’도 가끔씩 곤충, 돌멩이, 낙엽, 나무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따금 나무를 바라보며 그 ‘뿌리, 둥치, 가지, 잎사귀, 잎 하나하나, 잎맥 하나하나, 새로 난 줄기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무관심한 형태의 무한한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적 형태 너머로까지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길이 열릴 리 만무하다. 열린 관심도 없다. 보기에 따라 ‘나무는 초록색의 수천 가지 뉘앙스, 그러니까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수천 개의 나뭇잎을 뿜어내고 되살려’ 내는 존재이지만, 무심한 ‘잠자는 남자’에게 나무는 그저 나무일 따름이다.

페레크는 “그 나무에 대해 네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결국 그것이 한 그루의 나무라는 사실일 뿐, 그 나무가 네게 말해주는 모든 것은 한 그루의 나무라는, 뿌리라는, 그다음은 둥치라는, 그다음은 가지들이라는, 그다음은 나뭇잎들이라는 사실일 뿐. 너는 나무에게서 다른 사실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무는 네게 제안할 어떤 도덕도 갖고 있지 않으며, 네게 전달할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기에 ‘나무의 힘, 나무의 장엄함, 나무의 삶’ 따위도 그 주인공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런 무심한 남자에게 시인 조이스 킬머는 이렇게 말을 걸고 싶어 한다.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으랴/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마른 입술을 대고 서 있는 나무/ 온종일 신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가슴에는 눈이 쌓이는 나무/ 비와 더불어 다정하게 살아가는 나무…/ 나 같은 바보도 시는 쓰지만/ 신 아니면 나무는 만들지 못한다”(‘나무’)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많은 이들이 페레크의 남자처럼 나무에 무심한 게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나무와 구체적으로 교감하며 신의 뜻을 헤아리고, 새로운 의미화를 위한 감각적 기획을 킬머처럼 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봄이지 않은가. 어지러운 세상의 허공에 가까스로 균형의 미학을 알려주는 나무, 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깊은 뿌리로부터의 생명력으로 스스로는 물론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을 지켜주는 나무, 천의 잎새와 줄기를 통해 새로운 생명과 상상력의 유로를 알게 해주는 나무, 그런 나무에 대한 깊은 관심과 더불어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에 관한 몽상에 젖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새봄이니 말이다. 그러면서 내 안에 그리고 땅에 건강한 나무를 심고 가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