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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여기 말고 있을 데가 없어요" 구룡마을 주민들 망연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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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9 15:51:28 수정 : 2017-03-29 19: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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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에 속수무책이었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
“아이고 선생님, 우리가 돈이 있었으면 여기 살았겠습니까?”

29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만난 이모(82)씨는 “당장 오늘 어디서 머무르시냐”는 질문에 대답 없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착잡한 표정의 이씨 어깨 너머로 까만 잿더미가 한가득 보였다. 불에 타버린 그의 터전이었다. 이날 오전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이곳에 화재가 발생해 2시간여 동안 29개 세대를 태우고서야 불길이 잡혔다. 25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씨는 “당장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돈이나 있으면 나가서 전셋방이라도 한 칸 구할 텐데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라며 착잡해했다.
화재현장에서 채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교회에 마련된 ‘임시대피소’도 망연자실한 분위기였다. 10여명의 화재이재민들은 저마다 잿더미가 된 집에 들어가 성한 가재도구가 있을까 살폈다. 한 50대 주민은 까맣게 타버린 주머니를 보이며 “여기 목걸이랑 반지를 담아뒀는데 다행히 찾았다”며 “며칠 전 정리해두길 잘했다”며 씁쓸해했다. 대피소 인근엔 주민들이 부랴부랴 들고 나온 옷가지들과 가재도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화마를 피한 새끼고양이들이 검게 그슬린 이불과 함께 놓여있기도 했다.
이날 오전 8시50분쯤 구룡마을 7B지구에서 발생한 화재는 인근 가옥들을 태우고 10시46분에야 진화됐다. 불에 탄 29세대 중 중 26세대가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한 주민은 “‘스르륵’하는 소리에 불이 시작되더니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며 “주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바로 뛰쳐나와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연기를 흡입한 주민 3명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경찰은 “야외용 가스히터를 손질하던 중 가스가 새어나온 것을 모르고 점화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붙었다”는 주민 A(69)씨의 진술을 확보하고 실화(失火)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다.

구룡마을은 1970~80년대 각종 공공·건설 사업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모여 형성된 무허가 판자촌이다. 90년대 후반 한때 3000세대가 들어서기도 했던 이곳은 현재 110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구룡마을은 화재위험성이 계속해 지적돼 왔다. 수십년 간 크고 작은 화재가 끊이지 않았던 이곳에선 2009년 이후 13차례나 불이 났고, 2014년 11월엔 대규모화재가 발생해 100여명의 화재이재민이 생기기도 했다. 가옥 대부분이 화재에 취약한 비닐·목재 등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이날 역시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더욱이 LPG 가스통도 여기저기 방치돼 있어 자칫 연쇄폭발 등의 위험도 있다. 소방당국은 이날 화재진압이 늦어진 데 대해 “LPG가스통, 기름 보일러 등 탓에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소방당국은 구룡마을을 ‘화재경계지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화재현장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 김모씨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늘 마음 한 켠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며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도 다들 오갈데가 없어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주민들도 매년 화재가 되풀이되는 등 위험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저히 떠날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한 80대 주민은 화재현장에서 20m가량 떨어진 벌판을 가리키며 “저곳도 원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곳”이라며 “2014년 11월에 화재가 나 잿더미가 된 뒤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돼 풀만 무성한 공터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화재가 난 곳도 이제 끝났다. 다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피해 주민들은 인근 주민센터로 대피했지만 이후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막막해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이 임시로 만든 대피소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강남구청은 2014년 화재 당시 화재이재민들의 임시대피소로 활용된 주민자치회관을 “신고된 용도가 아니다”라며 강제로 철거한 바 있다. 당시 일각에선 강남구의 개발방식을 비판한 구룡마을 주민들에게 돌아온 보복성 조치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은 서울시와 강남구가 사업방식에 갈등을 빚으며 수년 간 표류한 상태였지만, 최근 개발방식이 합의되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시는 940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구룡마을을 임대와 분양 아파트가 혼합된 이른바 ‘소셜믹스’ 단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판자촌 주민들에게 저렴한 월세로 서울 곳곳의 임대주택에 이주하도록 독려하고, 새롭게 지어질 임대주택에 우선 입주할 수 있는 권리를 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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