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도 ‘개나리꽃’에서 “나는 아무래도 개나리꽃에 마음이 더 간다”고 고백했다. “그늘진 곳과 햇볕 드는 곳을 가리지 않고/ 본래 살던 곳과 옮겨 심은 곳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이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산동네든 공장 울타리든 먼지 많은 도심이든/ 구분하지 않고 바람과 티끌 속에서/ 그곳을 환하게 바꾸며 피기 때문이다.// 검은 물이 흐르는 하천 둑에서도 피고/ 소음과 아우성 소리에도 귀 막지 않고 피고/ 세속이 눅눅한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피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저 보살은 공원 울타리와 검은 창고 옆, 주차장과 매연 속 도로 곁에서도 피어나고 있었다.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고 썼던 김사인의 ‘개나리’처럼 어디에 뿌리를 내려도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리는 저 보살의 힘은 어디에서 싹트는 걸까.
영국 정신분석의 앤서니 스토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고 ‘고독의 위로’에 썼다.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의 불행이나 역경과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신과 화해했으며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종교적인 신만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수용하는 경지이다. 3.2평 독방에서도 얼마든지 꽃은 피울 수 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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