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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화(迎春花), 봄을 맞는 꽃. 이리 풀이하면 영춘화는 여럿이다. 이른 봄 제 몸의 열기로 눈을 녹이며 피어오르는 황금잔 같은 복수초, 아직 쌀쌀한 대기에 쌉쌀한 향을 날리는 매화, 이어서 대지에 노란 등불을 밝히는 산수유. 정작 자료를 찾아보면 영춘화는 이 땅에서는 개나리를 특정해 일컫는 꽃이다. 오늘 산책길에는 영춘화가 제법 피어나는 걸 보았다. 이 나리님은 다른 봄꽃들에 비해 그리 각광받는 편은 아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어서인가. 냄새 나는 하천가에도 피고, 시끄러운 공장 담장 밑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개’가 앞에 붙어 개나리인가. 개백정, 개망나니처럼 천한 욕지거리의 대상 앞에 늘 애꿎은 개를 들먹이는 게 우리네 언어습관이지만 개나리는 죄가 없다. 억울하다. 죄는커녕 가지만 꺾어 꽂아 놓으면 어디에서든 질기게 피어나 제 주변을 환하게 바꾸어낸다. 개나리 보살이다.

도종환 시인도 ‘개나리꽃’에서 “나는 아무래도 개나리꽃에 마음이 더 간다”고 고백했다. “그늘진 곳과 햇볕 드는 곳을 가리지 않고/ 본래 살던 곳과 옮겨 심은 곳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이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산동네든 공장 울타리든 먼지 많은 도심이든/ 구분하지 않고 바람과 티끌 속에서/ 그곳을 환하게 바꾸며 피기 때문이다.// 검은 물이 흐르는 하천 둑에서도 피고/ 소음과 아우성 소리에도 귀 막지 않고 피고/ 세속이 눅눅한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피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저 보살은 공원 울타리와 검은 창고 옆, 주차장과 매연 속 도로 곁에서도 피어나고 있었다.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고 썼던 김사인의 ‘개나리’처럼 어디에 뿌리를 내려도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리는 저 보살의 힘은 어디에서 싹트는 걸까.

영국 정신분석의 앤서니 스토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고 ‘고독의 위로’에 썼다.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의 불행이나 역경과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신과 화해했으며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종교적인 신만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수용하는 경지이다. 3.2평 독방에서도 얼마든지 꽃은 피울 수 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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