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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존재 뒤편 풍경에 대한 소묘 - 환지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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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03 01:12:53 수정 : 2017-04-11 17: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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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산 (1946∼)
책상 위, 잘 익은 홍시 속 아득한 길이 열리고,
그 옆으로 뭉턱뭉턱 노을이 지는 강물이 흐르고…
존재하지 않는 소녀와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혼자 남을 그녀가 안쓰러워 휘파람을 불며 걷고있습니다.
어, 저기 강에서 언덕바지로 오르는 계단 위 통나무 집,
그 뒤꼍에서 낯익은 속옷들이 펄럭이네요.
다시 책상 위로 홍시 하나가 뚝하고 떨어져
먼저 떨어진 놈 옆 앉아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오르는 나를 바라보고 히브죽이 웃네요.


환지통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이 시를 쓴 윤석산 시인은 몇 년 전 큰 뇌수술을 받은 적 있는데 아마 그 휴유증으로 환지통에 시달렸지 않나 싶다. 시인의 열정과 소신에 찬 활동을 평소에 지켜봐온 이들에겐 뜻밖의 소식이다.

김영남 시인
그는 한국의 모든 것이 중앙인 서울에 집중되어 있을 때, 잡지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제주도에 ‘다층’이라는 시전문지를 1999년 창간해 시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어 전국 계간문예지 편집자대회, 한·일시인대회, 한국문학전자도서관 설립 등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변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한 시인의 의지로 최초로 추진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하여 제주도가 외지인들에게 단순 관광지가 아닌 문학·예술이 숨쉬는 중요 문화공간으로서 인식되게 하는 데 그의 활동이 크게 기여했다.

인용시는 작자가 뇌수술과 목수술로 목소리를 잃어버렸는데 환지통처럼 없어진 것으로 인해 환상에 시달린다. 자아분열상이 심해 보이는 풍경마다 허상이 존재하고 거기에 2중의 내가 방황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의 새 시집을 다 읽고 나니 고저 강단이 분명했고, 쩌렁쩌렁했던 시인의 목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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