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신병주의역사의창] 문종이 앵두나무 심은 뜻은…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의 창

입력 : 2017-04-05 02:05:46 수정 : 2017-04-11 17:53:5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경복궁 후원서 손수 길러 세종께 올려 / 효심 떠올리며 나무 한 그루 심어보길
오늘은 식목일이다. 식목일은 2006년까지 공휴일이었으나,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가장 만만한(?)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아무래도 국토 황폐화를 막기 위한 산림녹화 사업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식목일을 따로 지정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식목일에 나무 심기가 전국적으로 장려되던 시기 필자도 초등학교 4학년 식목일에 작은 동산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은 것이 특히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그 나무를 자신의 나무로 정해주고 매일 물을 주게 했는데, 졸업 후 30여 년 만에 찾은 그곳에 무성히 자란 나무를 보고 큰 보람을 느낀 적이 있다.

‘문종실록’에는 문종이 왕세자 시절 한 그루의 앵두나무를 심은 기록이 나온다. 앵두는 앵도(櫻桃)라고도 하는데, 꾀꼬리가 잘 먹고 생김새가 복숭아와 비슷하다 하여 ‘앵도’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효심이 뛰어난 문종은 세종께서 몸이 편안하지 못하자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려 세종이 이를 맛보게 하였고, 세종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문종은 또 경복궁 후원(後苑)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직접 물을 주면서 정성껏 길렀다. 그리고 앵두가 익는 철을 기다려 세종께 올렸다. 세종은 이를 맛보고서 “외간(外間)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앵두를 즐겁게 먹었다고 한다.

문종의 효심이 깃든 나무여서인지 창덕궁과 창경궁에도 앵두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눈이 밝은 관람객이라면 현재도 궁궐 곳곳에 숨어있는 앵두나무를 찾을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궁궐 과수원에 해당하는 장원서(掌苑署)에서도 앵두를 수확해서 주로 종묘 제사에 올리는 데 활용하였다. 성종 때에는 장원서에서 수확한 앵두가 ‘살이 찌고 윤택하지 않다’는 이유로 담당 관리가 문책을 당하기도 하였다. ‘중종실록’에는 1512년 여름에 ‘앵두를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에 내렸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앵두 수확은 궁궐 신하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종은 8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29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질환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세종을 잘 보필하면서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낸 숨은 공로자였다. 세종의 업적으로 알려진 측우기 발명, 4군6진 개척에 활용한 화차(火車) 발명, ‘고려사’ 편찬은 실상 문종이 주도한 것이었다. 1450년 2월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은 예법을 다해 헌신적으로 2년3개월간의 삼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 악화로 이어졌고, 문종이 3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문종실록’에도 “세종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위셨다. 매양 삭망절제(朔望節祭)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식목일인 오늘 아버지 세종을 위한 문종의 효심을 떠올리면서, 주변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