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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현금 없는 세상 낭만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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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07 21:27:39 수정 : 2017-04-11 18: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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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5호선 지하철역 한쪽에는 누런 점퍼를 입은 할머니가 늘 웅크리고 앉아있다. 점퍼는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정도로 때가 묻어있고 피부는 여든을 훌쩍 넘긴 듯 짜글짜글했다. 그는 역에서 돗자리를 펼쳐놓고 면봉과 스타킹, 팔토시를 팔고 있었다. 가격은 개당 1000원. 껌은 1500원을 받았다. 물건들은 오랫동안 손님을 기다린 듯 먼지가 수북했다. 기자는 종종 면봉이나 팔토시, 껌을 사드렸다. 기자에게는 커피 한 잔 값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식사 한 끼 값이다.

그날도 기자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왠지 그날은 등까지 더 굽어보였고 몸도 더 왜소해진 듯 보였다. 할머니께 다가가 껌을 집어들었다. 그런 뒤 바지 뒤춤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뿔싸. 지갑에는 이런저런 카드들뿐이었다. 동전은커녕 1000원짜리 지폐 한 장도 없었다. 한 달 전 할인 혜택과 연말정산 우대에 혹해 체크카드를 발급받았던 게 떠올랐다. 기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할머니께 죄송하다고 말하고 뒤로 돌아섰다.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염유섭 경제부 기자
현금이 사라져가고 있다. 카드와 전자화폐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체크카드를 사용하면 연말정산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지갑에는 현금 대신 카드가 자리를 차지했고, 카페에서 스마트폰으로 결제하면 할인받는 세상이 됐다. 한국은행도 동전 없는 사회에 대비하는 시범 사업을 시작했다. 신규 동전 발행 비용이 연간 약 550억원에 달하고, 2015년 동전 폐기액도 약 15억원에 이른다. 이런 사회적 비용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젊은 층에선 스마트폰 케이스에 카드만 꽂고 다니는 이들도 많다. 현금이 사라지다보니 이제는 노숙인들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도 2015년부터 카드결제를 받기 시작했다. 빅이슈 관계자는 “전국 60개 판매처 중 40곳에서 카드결제를 받고 있다”며 “결제에 따른 수수료는 빅이슈가 부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판매 수익으로 노숙인의 재활을 돕는 빅이슈 입장에서는 부담이 조금 늘었다.

그런데 과연 현금 없는 세상은 낭만적일까. 소액 현금은 그동안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돕는 용도로 활용됐다. 요즘은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예전엔 가게나 택시 안에 돼지저금통이 비치돼 있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나 부담없이 소소한 금액을 기부할 수 있도록 고안해낸 기부 방식이었다. 소비자나 승객들은 거스름돈이나 주머니 속 현금을 그 통에 집어넣곤 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기부 행위를 통해 마음 한쪽이 훈훈해지는 경험을 해봤으리라. 현금이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에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모든 것이 0과 1로 환산되는 디지털 시대는 편리하지만 때론 세련된 건물을 짓기 위해 없애버린 추억의 골목길 같은 것이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다. 디지털 화폐만 들어있는 지갑처럼. 현금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비용은 때론 낭만을 만든다. 연인을 향한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정성과 애틋한 마음이 담긴 비용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염유섭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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