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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철쭉 속의 무한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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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24 23:47:28 수정 : 2017-04-24 23:4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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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알지 못함’으로 넘쳐나는 신비
건강한 생태윤리의 지평 정립해야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신비로운 체험을 시로 형상화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 부분이다. 정말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그 무한의 우주를 체험하고 터득할 수 있다면 참으로 황홀하겠다. 그렇지만 그런 황홀경이 실제 삶에서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기에, 일련의 실망이나 절망 속에서도 다시 도전하는 게 아닐까.

흔히 ‘대지의 청지기’로 불리는 미국의 농부이자 시인, 문명비평가인 웬델 베리는 과학 기술에 근거한 현대 문명을 심각하게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과학 기술은 객관적 앎의 척도를 제공하기보다 존재하는 생명을 제대로 못 보게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모래를 알기 위해 미분화해 분석, 종합하지만 정작 모래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거룩함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 들꽃의 신비도, 손바닥 안의 무한도 터득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피조물 자체의 생명성보다 과학적 환원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다.

‘삶은 기적이다’에서 베리는 그 위험성을 논한다.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가 경의에서 인식으로 바뀐 것이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청지기에서 절대적 소유자, 관리자, 기술자로 바뀐 것, 그리고 생명의 ‘거룩함’을 ‘전체성’으로 바꾼 것도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소박한 듯 심원한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생명은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어떻게 해서, 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생명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은 통제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통제는 환원주의와 함께 엄청난 파괴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는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은 현대의 미신이라고 말한다. ‘알지 못함’의 심연을 헤아리지 못한 채 ‘앎’으로 포장되는 사례가 많은 까닭이다. 그가 보기에 삶은 온갖 ‘알지 못함’으로 넘쳐나는 신비로운 것이고,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것 이상으로 훨씬 기적적인 것이다. 그런 성격을 회복하는 일이 긴요하다. 신비롭고 기적적인 삶의 심연으로 내려가기 위해 기준과 목적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피조물과 애정으로 가득 찬 세계로, 우리가 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세계로, 모든 과정들에 앞서면서 동시에 그 뒤에도 살아남는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술적 능력보다는 지역과 공동체의 성격에 근거해 행동해야 하며, 생산성보다는 지역에 대한 적응성, 기술혁신보다는 친밀성, 힘보다는 우아함, 소비보다는 검소함 같은 건강하고 타당한 생태 윤리의 지평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그는 강조한다. 그래야 다시 절망에 도전할 수 있단다.

인공지능(AI),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할 4차 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기적적인 삶의 신비, 그 ‘알지 못함’의 심연이 그 어두운 그림자에 매몰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침 벚꽃이 지고 철쭉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계절 아닌가.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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