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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원주민 쫓아내는 한옥마을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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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12 21:39:32 수정 : 2017-05-12 21: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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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촬영에 주의해 주세요.”

골목 입구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90년 넘은 목조 한옥들 사이로 가게 수십 곳이 새로 문을 열었다. 골목마다 한옥을 개조하는 공사도 한창이었다.


조병욱 경제부 기자
며칠 전 서울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일대 한옥마을에서 만난 풍경이다. 이곳은 1920년대 지어진 보급형 한옥 100여채가 아직까지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 한옥집단지구다. 당시 도시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서민 주거지가 필요해지자 부동산개발업자 정세권이 전통 한옥보다 크기를 줄인 보급형 한옥단지를 만든 것이 지금껏 이어져 왔다. 기존의 한옥을 줄여 만든 ‘집장사 집’의 원형이기도 하다. 재개발이 여러 차례 추진됐지만 매번 아슬아슬하게 개발의 광풍을 피해가며 버텼다. 이곳의 월세 20만원짜리 쪽방은 도심에서 밀리고 밀려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다.

얼마 전 익선동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도시공간기획자’로 자신을 칭하는 사람들이 거대자본을 등에 업고 들어오면서부터다. 이들은 온라인 펀드를 통해 연 10%가 넘는 고수익을 보장하며 돈을 끌어모았다. 한옥들은 숙박업소, 파스타집, 카페, 술집 등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개조됐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카메라를 손에 쥔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임대료가 폭등했고, 월세를 감당하지 못한 원주민들은 또다시 어디론가 쫓겨났다.

남아 있는 주민들은 상점 주인들이 애초부터 기존 주민들과 소통할 마음이 없다고 토로한다. 한 주민은 “몇 달을 시끄럽게 공사하고서도 이웃에 떡 한 번 돌린 가게를 찾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빨래가 널린 마당과 주민들이 소일하던 나무 그늘, 뒷짐을 지고 골목을 돌아다니던 노인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또다른 주민은 “모이지 않으니 서로의 소식에 점점 더 무뎌지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외지인의 눈을 피해 흩어졌다. 좁은 골목과 맞닿은 작은 한옥집 특성상 안에서 말하는 소리는 밖으로 다 새어나간다. 결국 주민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어느 빈집 우편함에는 부동산에서 두고 간 명함이 꽂혀 있었다. 쪽방 세입자에게 부동산 명함은 퇴거 통보처럼 무겁게 다가온다. 이미 서울의 여러 골목이 젠트리피케이션(낙후된 구도심이 고급 상업·주거 지역으로 바뀌면서 중산층이 몰리고 원주민은 쫓겨나는 현상)을 겪으며 반짝 인기 이후 본래의 특색을 잃고 슬럼화되길 반복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노출시키는 ‘가난 포르노’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보호받아야 할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마구 헤집고 들어오는 상업자본에 최소한의 양심이나 배려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문재인정부는 “저소득 서민들에게 따듯한 주거복지의 손길이 닿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이 공약이 살곳을 잃어가는 서민들의 쉴곳을 마련하는 정책으로 실현되길 기대한다.

조병욱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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