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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탕평 정치를 실천한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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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16 23:18:59 수정 : 2017-05-17 15: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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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9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새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것은 ‘탕평’의 정치였다. 전임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물러나게 된 중요 원인이 불통과 소수 측근에 의한 정치임을 반면교사로 삼아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무엇보다 우선할 것을 선언했다.

조선시대 ‘탕평’을 정책으로 삼은 대표적인 왕은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였다.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한 것은 조선중기 이후 당쟁이 치열하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 소모와 정치 보복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숙종이 주축 당파를 교체하는 환국(換局) 정치를 통해 돌파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숙종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은 절정에 이르렀고, 경종 즉위 후에는 영조의 지지 세력 다수가 희생되기도 했다. 왕의 자리마저 위협받는 당쟁의 폐단을 몸소 체험한 영조는 즉위 후 ‘탕평’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탕평은 ‘서경’ 홍범의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과 ‘무당무편 왕도평평(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서, ‘편을 가르지 않고 당을 만들지 않으면 왕의 도가 넓게 펼쳐지고 공평해진다’는 뜻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박세채가 탕평론을 강조했는데,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이를 정치 현장에 직접 적용시킨 것이었다.

‘영조실록’에는 매사에 국정 철학으로 ‘탕평’을 강조한 왕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탕평하는 것은 공(公)이요, 당에 물드는 것은 사(私)인데, 여러 신하들은 공을 하고자 하는가, 사를 하고자 하는가”라고 한 것이나, “나는 다만 마땅히 인재를 취하여 쓸 것이니, 당습(黨習)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을 보낼 것이다. (…) 왕의 마음이 이러한데 신하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나의 신하가 아니다”고 한 것에는 당쟁을 근절하고 탕평을 실천하겠다는 왕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영조는 탕평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송인명, 주문명, 조현명 등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을 등용했는데,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 등은 탕평파 대신이라고 칭해졌다. 1742년에는 성균관에 친필로 쓴 탕평비를 건립했다. 예비관료인 성균관 유생들이 국정 철학인 ‘탕평’을 항상 염두에 두면 관리가 되어서도 이를 실천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군자지공심(周而不比 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소인지사의(比而不周 小人之私意)’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지음은 소인의 사심이다’라는 뜻이다. 1772년에는 당심(黨心)을 버려야 한다는 취지로 ‘탕평과(蕩平科)’를 특별히 설치하여 탕평책을 재위 기간 내내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탕평책의 추진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꾀한 영조는 균역법과 같은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각종 편찬 사업을 통해 문화 정리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흔히 조선후기 중흥의 시대로 파악하는 영조, 정조시대로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정치의 화두로 삼은 탕평책이 자리를 잘 잡아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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