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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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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18 21:23:34 수정 : 2017-05-18 21: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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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자존감의 굴레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련다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현대 심리학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기준이 돼 가고 있다. “저는 자존감이 낮아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요.” 인문학 강연에 나갈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런데 자존감은 꼭 높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항상 자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황하거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엄격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향한 지나친 너그러움이 타인을 향한 무심함으로 번져가는 사람도 있다. 자존감이라는 개념 자체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기보다는, 때로는 내가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다양하게 바꾸어보는 것이 좋다.


정여울 작가
이런 마음으로 정유경 시인의 ‘나를 위한 노래’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나는 내가 신기해/ 나는 내가 궁금해/ 나는 내가 낯설고/ 나는 내가 새로워/ 때론 내가 두렵고/ 밉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소중해/ 나는 내가 중요해.” 시인의 해맑은 시선이 ‘자존감’이라는 개념에 지쳐버린 내 마음을 맑게 비춰준다. 이렇게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나를 너무 다그치지 않고,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새로워지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존감이라는 단어에는 무거운 피로감이 묻어 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과잉된 압박감이 느껴진다. 때로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잠시 잊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너무 높거나 너무 낮게 바라보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바라보는 것도 에고(Ego) 중심의 세계관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닐까.

문태준 시인의 ‘나는 내가 좋다’를 읽고 있으면, 나의 단점을 바라보는 가혹한 시선이 누그러든다.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생채기가 한결 나아지는 느낌이다.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 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시인의 속삭임은 자존감을 무기처럼 키워서 생존경쟁에 살아남고자 하는 현대인의 지친 마음에 안식을 준다.

이 시인은 자신이 멋지거나 대단한 장점을 가져서 스스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안구에 새겨진 흉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직도 자식의 흉터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정작 시적 화자는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은 눈물이 고일 것만 같은 그 안구 속의 흉터조차 사랑한다. 시인의 속삭임에 나도 용기를 얻는다. ‘넌 도대체 왜 그러니, 뭐나 문제니.’

너무 자주 이렇게 다그치는 나 스스로에게 이제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요. 더 멋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저 제가 저라서 좋아요. 제 흉터조차도, 제 아픔조차도, 그게 가장 나다운 모습이라 좋습니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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