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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 십시일반의 기적… 따뜻한 세상 위해 ‘작은 힘’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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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21 08:00:00 수정 : 2017-05-20 20: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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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벤처·친환경에너지 개발 등/스토리·사회적 가치로 마음 움직여/투자자 찾기 힘든 독립영화서 두각/지난해 도입 증권형 펀딩 245억 모아/173개 기업의 프로젝트 성공적 진행
# 월경을 시작한 지 어느덧 17년차지만 ‘생리’라는 단어를 입 밖에 올리는 것조차 쑥스러워했다는 오희정(29·프로듀서)씨. 우연히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러 갔다 만나게 된 네덜란드 친구들이 생리와 각종 생리용품에 대해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왜 나는 그동안 십여 년째 겪고 있는 내 몸의 현상을 수줍어하고 있었을까.’ 오씨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자 친구들도 숨은 고민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오씨는 여성의 몸과 사회적 낙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고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 관련 기획안을 올렸다. 제작경험이 없는 오씨의 기획안에 호응한 170명이 5000만원에 가까운 돈을 선뜻 제공했다. 오씨의 데뷔작 ‘피의 연대기’는 네티즌들의 성원에 힘입어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는 중이다.

# 강연수(43) 올스웰 대표는 철강 회사 근무 시절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선진국 공장들의 깨끗한 현장 환경에 감탄했다. 뿌연 먼지가 떠돌고 있는 우리나라의 일부 공장들이 떠올랐다. 강씨는 선진국의 산업현장 환기 장치를 도입해 국내 공장에 납품하는 회사를 창업하겠다는 구상 아래 ‘근로자 작업공간 개선을 위한 공기청정기 도입’ 아이템으로 창업 자금 모금에 나섰다. 벤처투자자들은 강씨의 사업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판단으로 투자를 머뭇거렸다. 하지만 크라우드펀딩 투자자들은 강씨의 문제의식을 높이 샀다. 강씨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창업 자금도 확보하고 홍보 효과도 톡톡히 누렸다. 요즘은 미세먼지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국내는 물론 중국 현지 기업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네티즌들의 십시일반 투자를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크라우드펀딩’이 우리 사회를 조용히 변화시키고 있다.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투자자를 찾기 힘들었던 독립영화들이 지금은 속속 상영관에 걸리기 시작했다. 농업과 ICT(정보통신기술)를 결합한 농업벤처, 파력발전 같은 생소한 친환경에너지들에 대한 투자도 ‘증권형 크라우딩 투자’ 도입과 함께 아연 활기를 띠고 있다. ‘투명전도성물질로 몇 초 만에 물 끓이는 기술을 개발한 스타트업’, ‘나만의 이색 향기를 찾아 만들어 주는 기업’, ‘폐업위기에 놓인 대학가 명물 가게 부활운동’ 등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성공의 비결로 ‘스토리’와 ‘사회적 가치’가 네티즌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입을 모은다. 강 대표는 “대중들이 투자 성과뿐 아니라 근로자의 작업환경 개선이라는 목표에 동감해 흔쾌히 투자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이 도입된 지난해 1월 말 이후 2017년 4월 말 기준, 현재까지 총 173개의 기업이 244억7900만원의 자금을 확보해 프로젝트 진행에 성공했다. ‘펀딩이 완료된 후 1년간은 매매할 수 없다’는 전매제한 규정이 거래소 창업지원센터(KSM)에 한해서만 지난 4월부터 해제되면서 46개 종목 중 27건(7436만원)이 한 달 사이에 전부 거래됐다. 큰 호응을 얻었던 수제 자동차 업체 ‘모헤닉 게라지스’의 경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1회당 최대 투자 한도금액인 7억원을 3번씩이나 모집한 후 KSM에 등록, 최초가 5만원이었던 주식은 2.5배나 오른 12만5000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의 경우 아직 걸음마 수준인 데다 투자금액 제한으로 절대적인 액수 자체는 크지 않다. 하지만 모집자들은 자금을 조달 받는 것뿐 아니라 마케팅 효과가 뛰어나고 향후 관심 있는 잠재 투자자들에게 알려져 추가 사업자금을 지원받는 데 효과적이라는 지적을 했다. 

크라우드펀딩이 특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분야는 공익 목적의 각종 프로젝트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이다. 국내 대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 따르면 해당 플랫폼에서 펀딩에 성공한 영화 총 21개 중 다큐멘터리 등 실화를 다룬 영화는 20%를 훌쩍 넘어선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눈길’의 경우 총 390명이 참여, 3억7600만원 가까이 모집되었다. 목표 모금액 도달까지 걸린 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정원석(26)씨는 “크라우드펀딩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상영되는 비율도 크게 늘었다”며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독립 다큐멘터리 생태계가 개선되면서 그동안 이야기되지 않던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는 것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화 '눈길' 포스터
영화 '너의 이름은' 포스터

영화에 대한 크라우드펀딩은 해당 영화가 당초 목표한 관객 수를 넘는 데 성공할 경우 초과 관객 수에 따라서 수개월 내에 수익실현도 가능하다. 올 초 개봉돼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영화 ‘너의 이름은’에 투자한 참여자들은 모두 80% 수익률(6개월 만기 40%, 연 80%) 대박의 주인공이 됐다. 이외에 영화 ‘판도라’(5.26%), ‘재심’(약 33.6%)의 투자자들도 수익 실현을 기다리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기존의 장외주식투자, 각종 벤처투자업체들과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의구심을 나타내지만 현장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강 대표는 “혁신적인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목적으로 한다는 벤처투자자들 역시 얼마나 빨리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가, 돈이 되는가에 집중하는 측면이 있는데 크라우드 펀딩에 투자하는 대중투자자들의 시각은 다르다”며 “다소 실험적이거나 빠른 성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목적이나 긍정적인 취지 자체에 대해 응원을 해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리워드형뿐 아니라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 투자에서도 투자자들은 돈뿐 아니라 사람과 스토리에 주목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실상 기부 형식으로 진행되는 리워드형 크라우드펀딩의 경우는 활황이지만 지난해 처음 도입된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은 좀처럼 성장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들은 모두 해외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각종 규제들에 묶여 성장에 제약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고용기 한국크라우드펀딩기업협회장은 “투자금액도 문제지만 먼저 공인인증서 요구를 비롯해 투자를 위해 필요한 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해 테크놀로지에 익숙하지 않은 50대 이상은 사실상 투자를 하기 힘든 구조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와디즈의 17일 통계에 따르면 20~40대가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3%를 차지하고 50대는 3%, 60대 초반은 1%, 60대 후반부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과 동떨어진 각종 투자규제들도 문제로 지적됐다. 예컨대 발행 최대한도가 7억원이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크라우드펀딩만으로는 충분한 자금을 모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한 회사에 투자할 수 있는 한도가 연간 200만원, 총액 500만원에 불과해 장기적으로 높은 수익을 실현하기 힘들다. 가장 문제로 꼽히는 것은 크라우드펀딩 관련 광고 규제다. 현재 법적으로 정해진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아닌 어떤 사이트에서도 프로젝트 내용을 직접 홍보하거나 설명할 수도 없다. 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관계자는 “해당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려는 기자들에게도 설명 자료를 보내지 못하고, 링크만 걸어서 보내고 있다”며 규제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라윤·조병욱 기자 ry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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