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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의병의 날’과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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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31 00:30:22 수정 : 2017-05-31 01: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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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첫 의병 일으킨 날 기려 제정 / 국가 헌신 인물들 제대로 평가·보상 받아야
5월이 지나고 6월이 다가오면 모두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서, 현충일과 6·25전쟁, 연평해전 등 호국선열에 대한 추모의 정이 깊어지는 달이기 때문이다. 2011년부터는 ‘의병의 날’이 제정되어 6월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의병의 날’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국민 통합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1552~1617)가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제정했다. 2011년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은 경남 의령에서 개최됐다.

곽재우는 전형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의령에 사는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했고 집안이 본래 부유했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40세가 넘은 고령이었지만, 곽재우는 국가 위기를 좌시하지 않았다. ‘홍의장군(紅衣將軍)’에 대한 유래도 흥미롭다. 곽재우는 그 아버지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장사들을 거느리고 의령현 및 낙동강가를 누볐다.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장군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는 기록에서, 당시 홍의를 입은 곽재우의 모습은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곽재우는 정암진전투 등에서 왜적의 진군을 차단하면서 조선군이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전세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1604년에 이루어진 공신 책봉에서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의 왕 선조는 자신을 수행해 피난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해서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 하여 86명이나 책봉했지만, 직접 전쟁에서 싸운 데 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6명밖에 책봉하지 않았다. 그나마 곽재우는 추천을 받기는 했지만, 생존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오르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의병장들의 최후는 비참했다. 호남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후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곽재우는 자신에 대한 조정의 감시가 심해지자 산으로 들어가 벽곡(壁穀)을 해 솔잎만 먹으면서 세상을 피했다. 김덕령이 뛰어난 용맹과 힘을 지니고도 모함에 빠져서 비명에 죽은 것도 곽재우의 은둔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곽재우나 김덕령 같은 의병장들의 쓸쓸한 말로는 일제 강점 시기 치열하게 항전했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던 현대사의 한 단면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역사의 잘못된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시대에는 국가에 헌신한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보상 작업이 철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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