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월 10일 구이린에서 복간된 ‘구망일보’는 광범위한 독자층과 항일논조로 대중성을 띤 전국적인 신문으로 거듭났다.
중국 광시성 구이린시에 있는 ‘구망일보’가 있던 자리. 안병무 선생(작은 사진)은 중국의 신문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활동을 적극 알렸다. 독립기념관 제공 |
옛 ‘구망일보’ 건물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지금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 구이린에서는 1984년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구망일보’의 활동상을 기념하고 있다.
안병무는 1941년 12월부터 ‘전선일보’에서 일했다. 중국 중앙군 제3 전구 사령관청에서 발행한 ‘전선일보’에 일본의 신문과 잡지 기사를 번역해서 게재했다. 또 이를 제3 전구 사령장관 예하 관계 기관으로 발송했다. 이를 계기로 안병무는 중국 제3 전구 전지선전위원회에서 출판하는 월간잡지사 ‘대로’ 등의 특별초청을 받기도 하는 등 일본문예 전문가로 활약했다. 안병무는 평남 안주 출생으로, 1930년 상하이로 건너가 푸단대학에 유학하던 중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그는 중국 19로군에 편입하여 대일전에 참가했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한국국민당의 청년단으로 활약했다. 특히 1940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 철제 하의 조선’이라는 책자를 발간, 일본 폭정을 폭로 했다. 1944년 3월부터는 임시의정원 비서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6월에는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및 편집위원을 겸했다. 해방 후 196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흥국중고등학교 등 10여개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교육과 종교운동에 헌신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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