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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포악해지고 있는 지구촌, 예(禮)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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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05 21:34:06 수정 : 2017-06-05 21: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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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들이 더욱더 잘 살려고
후진국 압박하면 평화는 없어
동양의 禮는 천지의 질서 의미
도학서 인류 새 길 발견했으면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긴 지도 오래되었다. 이 말에는 세계가 하나가 되었으니 인간도 각자 세계인이 되어 무역과 교통이 활발해진 만큼 경제적 부(富)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넓혀 함께 잘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와 목가적인 낭만도 깃들여 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세계는 점점 더 포악해지고 위험해지고 있다. 17∼18세기 전까지 중국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던 시대에는 동아시아는 ‘예(禮)의 질서’속에서 비교적 평화를 유지한 흔적이 많다. 물론 동아시아의 전쟁이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이은 청나라의 등장을 위한 전쟁이 있었지만 말이다. 중세의 서양은 이슬람이 주도하는 세계로서 지리적 위치만큼이나 중국과 무역을 통해 세계를 보다 풍부하게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서구가 만들어낸 중세 암흑시대라는 말과 근대의 계몽이라는 말은 상당히 빛을 잃게 된다.

우린 지금 너무 서구 기독교와 이성과 과학이라는 우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지금 세계의 포악과 위험이 이것과 관련된 것이라면 인류문명에 대한 일대 수술과 개혁이 없이는 평화와 행복을 달성하기 힘들 것이다. 기독교와 합리성의 철학과 자연과학으로 세계를 이끈 서구는 도구적 성격이 강한 과학을 무기로 세계를 정복하고 식민지화하고, 약탈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끌었지만 저들만의 잔치였는지 모른다. 그 사이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멸종되었고, 서양 야만인들은 동양에서 배워간 인문학을 통해 양반(신사)이 되었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최근 몇 권의 책을 읽은 가운데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와 ‘공자님의 상상력’은 필자로 하여금 동아시아 문명의 부활과 새로운 해석이 혹시 포악해져가는 세계인을 구하는 첩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했다.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과학으로 세계를 정복한 서구는 동아시아에서 배운 지식으로 자신의 도덕을 만들어갔고, 경제를 설계했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양반국가가 되었음이 잘 설명되어 있는 책이었다. ‘공자님의 상상력’은 공자의 사상을 서양학문을 배운 저자가 새롭게 해석해 통섭을 이룬 탁월한 책이었다.

오늘날 서양과학과 학문과 삶의 태도를 배운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구상을 요구받고 있다. 일본과 한국과 중국은 서양의 과학과 경제를 배웠고, 산업화와 함께 경제적 부도 어느 정도 성취했다. 서양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의 한계와 위험도 인식하게 되었다. 세계는 지금 동일성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동아시아인이 동서양 문명을 융합한 지평에서 새로운 문명의 목표를 설정할 때가 되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서구는 이미 깨어지기 시작했고, 파리기후협약도 미국의 탈퇴로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영국과 미국을 필두로 유럽제국들은 각자 국가주의로 환원하고 있다. 그만큼 세계를 이끌 만한 보편적인 힘이 서구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큰 나라의 큰 나라 됨이 없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지구촌이 혼란에 빠져 있다.

맹자에 ‘이소사대(以小事大), 이대사소(以大事小)’라는 말이 나온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도 작은 나라를 섬긴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섬김이 이루어지자면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인(仁)의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연 오늘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가. 동아시아의 세계질서였던 조공(朝貢)관계는 큰 나라인 중국이 작은 나라인 변방국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베푸는 시대였다. 서구가 지배하고부터 세계는 그러한 섬김의 질서 대신에 힘을 통한 폭력과 권력의 행사를 근간으로 운영됐다. 선진국이 더욱더 잘 살려고 하고, 후진국을 압박한다면 세계는 결코 평화로울 수가 없다. 오늘날 중국도 서구에서 배운 과학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구제국주의 식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 서구로부터 제국주의를 먼저 배운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서구보다는 일찍이 욕망의 절제를 추구한 동아시아에 미래적 희망이 더 있는 것 같다. 근대 초기에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에 주눅이 든 동아시아는 도덕적 자부심을 내려놓았지만 다시 회복해야 할 입장에 있다.

동양의 ‘예(禮)’는 단순히 형식화된 예의범절의 의미가 아니다. 말하자면 세계와 자신의 위치(관계)설정과 행동규범을 적절하게 요약하는 힘이다. 예는 천지의 질서를 의미하였다. 세계는 지금 ‘무례(無禮)의 천지’이다. 서양의 근대문명은 개인(개체)의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계하였지만, 곳곳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위선과 거짓과 타락과 힘겨루기로 점철되어 있다. 한국도 독선과 정의와 합법의 이름으로 무례가 범람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의 진정한 도덕주의의 부활이 그리워진다. 물론 옛날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지만, 그러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 서구지배의 지구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실천하며 인(仁)에 의지해 살다가 예(藝)에서 노닌다.” 이는 공자의 인생목표였다. 참으로 새길수록 미궁에 빠지는 구절이지만 씹을수록 맛이 있는 구절이다. 서양에 철학(哲學)이 있다면 동양에 도학(道學)이 있다. 동양의 도학에서 인류의 새 길을 발견해볼 수는 없을까.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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