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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제는 정신건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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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06 23:39:30 수정 : 2017-06-06 23: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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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때 참여한 역학조사 충격 / OECD “한국인 정신건강 심각” / ‘정신건강복지법’ 불구 갈 길 멀어 1974년 여름, 내가 전공의 1년차일 때 충남 당진·합덕 지역에서 정신질환 역학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지역 내 가구를 집집마다 방문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30대 남성 정신질환자가 있는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쇠사슬로 손과 발이 묶인 채 악취가 진동하는 골방에 갇혀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정신질환이 발병한 지는 10여년이 지났고, 그간 세 차례 입·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답답한 가족들은 병원치료와 별개로 굿도 하고 이런저런 민간치료도 하는 과정에서 가산을 탕진했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정신질환에 걸리는 바람에 논 20여 마지기를 자영하던 가계는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으로 몰락했다. 비슷한 사정을 가진 가정이 몇 집 더 있었다. 이제 막 의료인으로서의 길에 들어선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조사기간 내내 혼란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 저 환자의 삶은 무엇인가? 환자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밖에 없는 가족의 심정은 또 어떨까? 내가 환자의 가족이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이철 국립정신건강센터장·전 울산대 총장
그 후 40여년이 흘렀다. 1978년 건강보험제도 시작으로 정신질환자도 혜택을 받게 되었고 정신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국내의 연구도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보다 효과적인 약과 치료법이 개발·도입됐다. 정신질환자를 위한 정신병원과 시설도 많이 들어섰다.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으로 환자 인권이 개선되고 경제적인 부담도 다소 덜어졌다. 2016년 2월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정신건강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달 30일에는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던 ‘강제입원’절차를 20여년 만에 개선하고 정신질환자에 대한 복지지원의 근거를 마련한 ‘정신건강복지법’이 시행됐다. 정신건강복지법에는 그간 소홀했던 일반 국민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사업의 근거도 마련됐다. 정신건강 분야의 이러한 발전은 관련 학회와 협회, 환자가족 단체, 자원봉사자,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 각 분야 관계자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해 준 덕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3년 “한국인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정신건강 문제가 광범위하고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국민 행복도는 OECD 34개국 중 33위, 학생 ‘삶의 만족도’가 OECD가 조사한 48개국 중 47위, 자살률이 10만명당 26.5명으로 OECD 평균의 2배가 넘는 압도적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 국민 4명 중 1명(25.2%)이 일생 한 번 이상 정신건강문제를 경험하는데 그 중 15.3%만, 그것도 문제를 인식하고 나서 평균 1년8개월이나 지나서야 정신보건서비스를 이용한다. 선진국에서 정신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의 35∼40%가 조기에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외국에서는 정신보건의료 패러다임이 병원의 입원치료 중심에서 지역사회 조기 복귀를 촉진하는 사회통합 모델로 이미 전환됐다. 영국, 독일 등에서는 평균 입원기간이 1개월 내외인데 우리는 아직도 6.5개월로 6배나 긴 실정이다. 선진국들이 정신질환의 예방, 조기 발견 및 치료, 지역사회 복귀를 위한 지원시설과 서비스에 투자하는 까닭은 환자들을 불필요하게 시설에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고유한 삶의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인권의식, 사회통합이 치료효과가 높다는 과학적 근거, 또한 사후대응보다 조기 발견 및 치료, 지역사회 복귀를 위한 투자가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 훨씬 이득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에 이미 “정신건강 없이는 어떤 건강도 없다”고 선언했으며 2013년에는 ‘정신건강 실행계획 2013-2020’을 발표하면서 각국 정부가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새 정부가 시작되어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투자하지 않고는 국민의 건강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이제는 정신건강이다.

이철 국립정신건강센터장·전 울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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