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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광해군의 분조(分朝)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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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13 21:14:59 수정 : 2017-06-13 21: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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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 동안 전시 임시정부 구심점 활약
왕위 오른 후 외교분야서 탁월한 업적
최근 임진왜란 때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의 분조(分朝) 활동을 다룬 영화 ‘대립군’(代立軍)이 상영되고 있다. 대립군은 생활이 어려워 남을 대신해서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들로, 광해군이 대립군과 직접 만난 기록은 없지만, 광해군의 분조에 이름 없는 의병이 활약한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난을 당한 시기, 선조는 4월 29일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분조’를 이끌게 했다. 분조는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뜻으로, 사실상 임시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왕인 선조가 있는 대조(大朝)에 변고가 생기면, 분조가 정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1592년 6월 평양성에 있던 선조는 서북쪽으로 피란을 떠났고, 6월 14일 분조가 구성됐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강계로 향할 것을 명하였고, 영의정 최흥원, 병조판서 이헌국, 우찬성 정탁 등 15명의 대신이 분조를 돕게 했다. 1593년 1월 왕명으로 분조가 해체될 때까지 광해군은 7개월간 전시 임시정부의 구심점으로 활약하며 의병들의 항전을 독려했다. 당시 분조에 참여했던 정탁은 이때의 기록을 ‘피란행록(避亂行錄)’으로 남겼는데, 이를 통해 분조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분조는 6월 14일 영변을 떠나 맹산, 양덕, 곡산 등을 거쳐 7월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 도착해 이곳에서 20일간 머물렀다. 여름철이어서 자주 비가 내렸고 광해군 일행은 민가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면서 어려움을 견뎠다. “산길이 매우 험하여 열 걸음을 걸으면 아홉 번을 넘어져 일행 대소 관원 모두가 고생했다”는 기록은 어려웠던 정황을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중국 요동의 근접 지역으로 피란을 가는 선조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광해군은 일본군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전장에서 전시 정부를 지휘하며 리더로 성장해 갔다. 광해군의 분조가 자리를 잡자 피란을 갔던 관리들이 모여들었고,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공간으로 떠올랐다. “대저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 사람들이 세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어서 심지어 눈물을 떨구는 자도 있으며, 경기도의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투어 적을 잡아서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는 ‘피란행록’의 기록은 분조가 의병 봉기의 컨트롤타워가 됐음을 증언하고 있다.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7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임진왜란 초반 치열한 격전기에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광해군은 분조 활동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훌륭히 수행했고, 왕위에 오른 후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정권 후반기 측근 세력의 등용과 반대파에 대한 정치 보복, 무리한 토목 사업 등으로 말미암아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출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사례에서 초심을 유지하며 성공적인 왕으로 기억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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