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텔레그래프는 1905년 5월 13일자에 한국인의 소식을 전했다. 주영 한국대사관에서 이한응(1874∼1905) 서리공사가 침실의 창문에 목을 매 숨졌다는 보도였다. 그는 숨지기 전 유서를 남겼다.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하고 비통해하는 심정이 토로되어 있었다.
영국 얼스코트 트레보버 로드 4번지에 있던 대한제국 주영대사관 건물. 이곳에서 서리공사 이한응(작은 사진)이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며 순국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
대한제국 정부에서 영국에 상주공사를 파견할 때 이한응도 1901년 3월 14일 3등참서관으로 임명돼 약 4년간 런던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일제의 압력으로 민영돈 특명전권공사가 귀국한 뒤에는 서리공사에 임명됐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영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조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 보전을 위해 맹렬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러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조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강탈당할 것을 예상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보전하는 데에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서거한 뒤 조국에 돌아온 이한응은 고향인 경기도 용인에 안장됐다. 서울 장춘단공원에는 기념비가 있다.
류영현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