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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대한제국 주영대사관과 서리공사 이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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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15 21:45:07 수정 : 2017-06-15 21: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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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장차 무너지고, 온 민족이 남의 노예가 되리라. 구차스럽게 산다는 것은 욕됨만 더할 따름이라.”

영국의 텔레그래프는 1905년 5월 13일자에 한국인의 소식을 전했다. 주영 한국대사관에서 이한응(1874∼1905) 서리공사가 침실의 창문에 목을 매 숨졌다는 보도였다. 그는 숨지기 전 유서를 남겼다.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하고 비통해하는 심정이 토로되어 있었다.


영국 얼스코트 트레보버 로드 4번지에 있던 대한제국 주영대사관 건물. 이곳에서 서리공사 이한응(작은 사진)이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며 순국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이한응은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李璟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1892년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한성부 주사를 거쳐 1899년 관립영어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29세에 영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으로 부임했다. 이한응이 외교관으로서 진출하게 된 데에는 ‘영어’를 수학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유럽 최초로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1년 3월 민영돈을 영국 겸 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유럽 지역에 상주공사를 파견한 목적은 당당한 독립국가라는 것을 열강에 인식시키고, 독립외교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한 조처였다고 할 수가 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영국에 상주공사를 파견할 때 이한응도 1901년 3월 14일 3등참서관으로 임명돼 약 4년간 런던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일제의 압력으로 민영돈 특명전권공사가 귀국한 뒤에는 서리공사에 임명됐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영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조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 보전을 위해 맹렬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러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조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강탈당할 것을 예상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보전하는 데에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서거한 뒤 조국에 돌아온 이한응은 고향인 경기도 용인에 안장됐다. 서울 장춘단공원에는 기념비가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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