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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베이징 日 헌병대 형무소와 이육사 순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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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22 21:29:24 수정 : 2017-06-22 21: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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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년 8월호 ‘문장(文章)’에 발표된 ‘청포도’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1904∼1943)의 대표작이다. 본명이 이원록인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3년형을 받고 투옥됐다. 이때 그의 수인(囚人)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이육사(작은 사진)가 순국한 베이징 네이이구 동창후둥 1호 건물은 일제 헌병대 베이징본부 부속 형무소가 있던 곳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군정부·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9월 귀국해 이때부터 시 쓰기에 전념했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다.

1934년 신조선사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사에서 일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이육사는 1943년 당시 베이징에서 신문보급소를 경영하던 이상호에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해 말 국내로 잠시 들어왔다가 체포됐다. 이육사는 국내에서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돼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투옥됐다. 그는 폐병으로 원래부터 몸이 약했는데, 투옥되면서 잘 먹지 못하고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느라 병이 심해져 결국 순국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을 거듭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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