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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흰 옷 입고 붉은 열정 지닌 민족… ‘때깔 고운 나라’ 거듭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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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24 18:00:00 수정 : 2017-06-24 15: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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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삶 속에 스민 오방색(五方色) / 인간은 색깔 통해 표현·인식하며 살아 / 동서남북중 상징하는 청·백·적·흑·황색 / 우리 민족의 정서·삶의 가치관 고스란히 / 순 우리말 ‘때깔’은 멋·빛 어우러짐 의미 / 자신만의 고유색 가진 맵시 있는 국민들 / 오방색 조화 이룬 것처럼 화합·상생하길
하지의 태양이 뜨겁다. 오행에서 여름과 남방(南方)의 상징 색깔은 ‘붉은색(赤)’이다. 겨울의 상징 색깔인 ‘검은색(黑)’을 막기 위해 흰 눈이 내리듯, 여름의 붉은 열기를 막으려고 대지는 온통 푸른빛으로 버텨 보지만 때 이른 불볕더위에다 오랜 가뭄으로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른바 ‘열적 고기압’이 비를 몰고 올 ‘태평양 고기압’을 막고 있기 때문이란다. 기상청의 날씨정보가 SNS를 통해 온통 붉은 색깔로 나타나고, 코앞에는 윤오월이 기다리고 있으니 올여름은 더욱 무덥게 느껴진다.

인간은 색깔을 통해 표현하고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은 온도는 물론, 오존농도, 미세먼지농도 등도 수치와 함께 색깔 정보로 나타난다. 색깔에는 우리의 정서와 가치관은 물론 상징적 의미까지 들어있다. 우스개지만 정치판에서조차 색깔론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확실히 대한민국은 회화예술이 뛰어난 문화국가인가 보다.

우리말 중에 ‘때깔’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과일이나 옷감이 눈에 들어와 산뜻하게 비치는 ‘맵시’와 ‘빛깔’을 이르는 말이다. 때깔에는 아름다운 모양새와 고운 빛깔이 있다. 멋과 빛이 동시에 잘 어우러진 말이다. 이참에 매력적인 외모에 선명한 컬러가 있는 국민이 살아가는 때깔 있는 대한민국을 꿈꿔 본다.

‘맵시’와 ‘매무새’는 서로 통하는 말이다. ‘매무새’는 ‘매무시한 모양새’를 말하는데, 여기서 ‘매무시’는 옷을 입을 때 ‘매고’ 여미고 하여 ‘매만지는’ 일을 뜻한다. 외출 시에는 하던 일은 잘 ‘매듭짓고’ 차분히 ‘매’ 꾸며야 ‘매끈한’ 몸매가 돋보일 것이다. ‘눈매·몸매’의 ‘-매’라는 접미사도 맵시나 모양을 뜻한다.

‘빛깔’과 ‘빛’, ‘색깔’과 ‘색’, 이 밖에도 ‘색상, 색채, 물’ 등과 비슷한 말이 많다는 것은 ‘빛’이 그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다. ‘빛’이 없으면 ‘색’은 물론 생명도 있을 수 없다. 빛은 태양에서 발하는 것이었지만, ‘하늘빛, 능금빛’에서처럼 ‘물체가 광선을 흡수 또는 반사하여 나타내는 빛깔’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아가 ‘얼굴빛’에서처럼 ‘기색’을, ‘쓸쓸한 빛’에서처럼 ‘분위기’를, ‘희망의 빛’에서처럼 ‘바람’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럼 ‘색(色)’이란 무슨 뜻일까. 이 글자는 사람이 사람을 올라타고 있는 모양으로 원래는 ‘성행위 때 나타나는 흥분된 얼굴빛’을 뜻하며 ‘낯빛’이 본뜻이었다. 나중에 ‘여성의 미모’, ‘빛깔(color)’은 물론, 각양각색(各樣各色)에서 보듯이 ‘종류’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색에 빠지다’라고 할 때의 색은 ‘여색’의 의미이고, ‘색이 동하다’라고 할 때의 색은 ‘성적 교접’, 즉 ‘색사(色事)’를 뜻하는데, 이는 영어 ‘sex’와 발음도 비슷하다. ‘색(色)’이란 말에 대한 최고 접대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여기에서의 색이란 철학적 수준의 용어로 ‘유형(有形)의 만물’을 말하며, 이 만물은 모두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고 그 실체는 없다’는 말씀이다.

글자도 유전자 변이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의미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색(色) 자의 윗부분을 ‘칼 도(刀)’의 변형으로 보고 ‘빛 색(色)’을 ‘끊을 절(絶)’의 본자로 보기도 한다. 실을 끊으면 ‘끊을 단(斷)’, 일체 모든 것을 끊으면 ‘끊을 절(切, 截, 絶)’이다. 아무리 더워도 정신 줄을 놓으면 기절(氣絶)하게 되니 조심할 일이다.

우리 선조는 전통적으로 삼원색(三原色)보다 오방색(五方色)을 민족 정서의 기준으로 삼았다. 오방색이란 동(東)·서(西)·남(南)·북(北)·중(中)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으로 각각 ‘푸르다, 희다, 붉다, 검다, 누르다’와 같이 불렀다.

이러한 우리말 색채어는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대개 ‘풀’에서 ‘푸르다’, ‘해’에서 ‘희다’, ‘불’에서 ‘붉다’가 온 것은 동의하고 있지만, ‘검다’와 ‘누르다’에 대한 어원은 이론이 있다.

첫째, ‘푸르다’는 말은 원래 ‘풀빛’에서 출발하여 ‘파랗다’의 의미까지 아우르고 있다. 우리는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푸른 들판 속에서 푸른 가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고려청자에서 청바지까지 우리 민족의 푸른색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

둘째, 밝게 빛나는 해를 백일(白日)이라 하고, 대낮을 백주(白晝)라 한다. 백일몽(白日夢), 백일승천(白日昇天) 등의 예도 해를 ‘흰빛’으로 보고 있으니 ‘희다’는 ‘해’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 우리 선조는 해를 숭배하여 백두산(白頭山), 소백산(小白山)과 같은 성산 이름에 ‘흰 백(白)’ 자를 쓰고, 백자(白磁)를 사랑한 우리 선조는 자신을 스스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일렀다.

셋째, ‘붉다’는 말에서는 자연스럽게 ‘불’이 연상된다. 불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촉진제 역할을 해왔으며 ‘동지 팥죽, 고사 시루떡’의 ‘붉은빛’은 벽사(?邪)의 의미를, ‘붉은 악마’의 ‘붉은색’은 열정과 결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

넷째, ‘검다’의 어원을 ‘검댕’으로 보기도 한다. ‘검댕’ 또는 ‘검댕이’라 하면 그을음이 엉기거나 맺혀서 생기는 검은빛의 물질을 가리킨다. ‘그을음, 그림자’를 비롯하여 그림자의 옛말인 ‘그리메’, ‘그믐’이나 땅거미의 ‘거미’, ‘가막가치’의 ‘가막’ 등도 동원어로 볼 수 있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검다’가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검은 동물, ‘곰’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섯째, ‘누르다’의 어원으로는 땅을 가리키는 말 ‘눌’에서, 세상을 가리키는 ‘누리’에서, 누른빛의 동물 ‘노루’에서 왔다는 설 등이 맞서고 있다. ‘누런빛이 나도록 조금 타다’는 뜻의 ‘눋다’와 여기에서 온 ‘누룽지’도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고 본다. 천자문에서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 하여 ‘땅은 누르다’고 했다. 놋쇠의 ‘놋’도 무관하지 않다. ‘눌눌하다, 놀놀하다’는 말은 털이나 싹 따위가 ‘누르스름하다’는 뜻이니, 두고두고 생각의 근육을 길러 봐야겠다.

초등학교 시절 청군과 백군으로 나눠 싸웠던 운동회, 이는 동군과 서군의 싸움이었다. 풍수지리에서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부르는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 등도 방위와 색깔이 딱 맞아떨어진다. 태극기도 깃봉의 누른빛을 합하면 오방색으로 이루어졌다.

필자는 생래적으로 풀빛과 채소를 좋아한다. 어머님께서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너는 청말 띠에다 유월 태생이기 때문에 어딜 가나 먹을 복이 많단다.” 말띠가 풀이 많은 계절에 태어났으니 맞는 말이다.

누군가 카톡으로 ‘백시(白豕)’로 시작하는 상량문의 뜻을 물어왔다. 그중 ‘백시’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갑·을은 동방 청(靑), 병·정은 남방 적(赤), 무·기는 중앙 황(黃), 경·신은 서방 백(白), 임·계는 북방 흑(黑)입니다. 그리고 돼지(豕)는 ‘해(亥)’에 해당하므로, 백시(白豕)는 ‘신해년(辛亥年)’이군요.”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아무런 연습 없이 오방색 음식물을 먹으며 생을 도모하다가 어느 날 아무런 훈련 없이 누른빛 분뇨(糞尿)를 배설하다 죽는다. 살청(殺靑)하다 황토(黃土)로 돌아갈 몸이여….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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