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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친절을 강요받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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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23 23:42:55 수정 : 2017-06-23 23: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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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어느 날. 저녁 7시쯤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의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도착한 장문의 문자 메시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수리를 맡았는데 불만족스러운 수리 결과가 아니었나 싶어 걱정이 됩니다. 잘 사용되시는지 궁금해 전화 드렸는데 연락이 안 돼 문자 보냅니다. … 마지막으로 저에 대한 평가가 고객님한테 전화나 문자로 번거롭게 오실 수 있으세요. 받게 되시면 항목별 평가 부탁 드립니다.’

며칠 전 구입한 휴대전화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2시간 전쯤 들렀던 서비스센터 직원 A씨가 보낸 것이었다. 센터 운영 시간이 끝나 그도 여느 직장인들처럼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글자 수가 490자에 달하는 데다 ‘잘 사용되시는지’로 대표되는 사물 존칭에 각종 이모티콘이 섞여 있어 알 수 없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주절주절 여러 얘기를 적어놨지만 메시지의 방점은 마지막 문단에 찍혀 있었다. 서비스센터에서 확인 전화가 오면 그가 걸어온 전화를 잘 받았다고 말해달라는 것. 행간에는 서비스 만족도를 물으면 후한 평가를 해달라는 부탁도 담겨 있었다.

센터의 서비스 만족도 평가는 서면과 구두로 동시에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센터를 찾았을 때 서비스 만족도를 묻는 설문지를 이미 작성한 뒤에도 이런 전화까지 챙기는 걸 보면서 든 생각이다. 통화가 안 되자 구구절절한 메시지를 남긴 걸 보면 고객의 말 한마디가 인사고과에 미치는 영향도 작지 않은 듯싶었다. 그의 과한 친절은 자의에 의한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드는 씁쓸한 의문이었다.

박진영 사회부 기자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A씨는 이른바 ‘감정 노동자’다. 고객을 대할 때 좋거나, 슬프거나, 화나는 상황이 있더라도 회사에서 요구하는 감정을 보여주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란 얘기다. 자신의 감정은 꽁꽁 숨긴 채 고객에 대한 친절을 강요받는다. 실제 감정과 사측이 요구하는 감정 표현의 충돌로 부조화를 겪거나 고객을 대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난해 시민단체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감정 노동자 2737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7.7%가 이런 경험을 했다. 감정 노동자들의 인권 보호 등을 위한 ‘감정 노동자 보호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전화번호를 안내하는 114의 이 인사말이 2008년 12월 자취를 감췄다가 최근 일부 지역에서 부활했다. A씨의 명함에는 ‘고객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800만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사회의 감정 노동자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말들은 그들의 ‘직업적 의무’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고객은 그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욕설 등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무조건 빌고 사과하거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감정 노동자들을 보며 직업적 의무나 고객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구체적인 폭력이 없다 해도 강요된 친절에 순응해야 하는 이들은 상냥한 말투와 표정으로 자신의 진심을 감추거나 억눌러야 하는 게 일상이다. 이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감정 노동자들의 문드러지는 속을 살피고, 치유해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박진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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