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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는 구한말에 의병활동과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뒤엔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으면서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마음속의 38선은 무너지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언론인 송건호는 백범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일지라도 그것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오.” 그의 인생이 험난한 길로 점철된 이유를 알 듯하다.

백범은 1949년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장교에게 암살됐다. 오늘이 서거 68주기다. 올해는 백범 자서전인 ‘백범일지’ 발간 70주년이다. 그를 기리는 행사가 많다. 한국조폐공사는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김구 기념 메달’을 출시했고, 임진택 명창은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 CD를 발매했다. 클래식총체극 ‘김구 아리랑’ 공연도 이어진다. 서울시는 오늘 효창공원 백범묘소에서 ‘청년 백범은 어떻게 안중근을 만났을까’라는 부제로 ‘백범일지 낭독회’를 연다.

백범이 동학에 가입해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피신한 곳이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의 집이었다. 안중근과는 직접 대화도 나누지 못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안중근 가족을 각별히 보살폈고, 안중근의 막내동생 안공근 부자는 백범의 핵심참모와 비서로 일했다. 백범의 큰며느리 안미생은 안중근의 조카다.

백범은 말과 행동으로 후세에 값진 교훈을 남겼다. ‘백범일지’에선 자신의 호를 백범(白凡)이라 지은 데 대해 “백정(白丁)이나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 정도는 돼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겠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라고 했다. 백범을 기리는 날, 나라 안팎에 난제가 산적해서인지 백범의 숭고한 희생과 불굴의 정신이 더욱 밝은 빛을 낸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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