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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독립운동가 유자명이 일군 中 구이린 영조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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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29 21:44:18 수정 : 2017-06-29 21: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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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에 있던 영조농장이 있던 자리. 독립운동가 유자명(작은 사진)은 이곳에서 중국인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고 귤 등 농작물 재배기술을 연구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일제하 중국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유자명(1894∼1985)은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시 외곽에 농장을 조성했다. 영조농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유자명이 중국에서 농업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국내에서 수원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충주농업고등학교 전신)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자명은 1919년 3·1운동을 겪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신채호 등과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19년 6월 신의주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의 소개로 신한청년당 비서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당선됐다. 이 시기 선생은 단재 신채호의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역사’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아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됐다. 또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등을 읽으며 아나키즘에도 공감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면한 한국사회는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우선적이라 생각했다.

항일투쟁 속에서도 유자명은 농업에 관한 관심을 끊임없이 표출하면서 후학 양성에 열중했다. 그가 설립한 입달학원을 통해 배출한 중국인 제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농장을 경영하게 됐다.

1941년 12월 말 구이린시 영조농장에 도착했다. 당시 회교구국협회 위원장이던 백숭희가 그를 이곳으로 초청했다. 수만평 규모의 농장에는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사무실과 식당, 숙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942년 유자명은 인근에 자생농장 분장도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귤과 옥수수 등을 재배하며 농업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일본 히로시마 종묘원에서 들여온 귤 품종에 대한 개량사업을 진행해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자생농장 분장은 골프연습장으로 변해 있다. 유자명이 농업기술을 개발했던 연구소는 동강묘포 입구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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