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렇게 흘러가는 ‘능소화’라는 소설을 읽은 적 있어. … 그대는 능소화라는 꽃이 얼마나 높으신 몸인지 아는가. 나도 책을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추위에 약하고 번잡한 곳에서는 금세 시들어버리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 남쪽 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양반꽃이라는 별명까지 지니게 된 것이지. 간혹 서울에서도 그 꽃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누군가 겨울나기를 섬세하게 관리한 경우일 거야. 옛날에는 능소화를 상놈이 자기네 집에 키우면 관아에 불려가 치도곤을 맞았다는 얘기가 있어. 감히 상놈 주제에 능소화를 키웠다고. 글쎄, 과연 상놈이 키웠기 때문에 그랬을까?

유난히 양반가의 뜰에서 능소화를 많이 볼 수 있었던 건 사실인데, 그건 말이야,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거나 비교적 보호가 잘되는 양반이나 부자 집 근처에서 아무런 간섭 없이 잘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일 거야. 양반네들 집이야 비교적 오래 그 터와 형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지만 평민네들 허름한 집이야 무너지기 쉽거나 이사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식처 관리가 부실할 것은 뻔한 일이지.

내 고향 마을 능소화에 대해 언젠가 그대에게 얘기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더위에 지치고 지쳐갈 무렵, 늦여름에서야 주황색 은은한 꽃을 피워내는 그 능소화. 치렁치렁 줄기에 매달린 채 하늘을 항해 나팔이라도 불 것처럼 품격 넘치는 자태로 피어나던 능소화는 내게 누님 같은 이미지로 깊이 박혀 있어. 고향 집 담벼락을 유난히 화려하게 타고 오르던 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꽃이 능소화라는 이름인지도 몰랐고, 후일 도시로 나와 성장하면서 식물도감에서 확인한 것이었다. 남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우연히 능소화를 차창 밖으로 발견하면 항상 그곳이 고향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누님은 어린 나보다 열 살이나 위였어. 어머니보다 더 살뜰한 존재였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늘 부재중이었어. 행상을 다니던 쭈글쭈글한 어머니는 며칠 만에 집에 오면 모래 더미처럼 무너져 안방에서 잠만 자던 기억이 난다. 뽀얀 누님에게선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향기가 났어. 어린 누님이 화장을 한 것도 아니었을 터이니 그 향은 또래의 처녀에게서 나는 아찔한 살 냄새 아니었을까. 능소화가 하늘을 능멸하는 꽃이라는 거 아는가. 업신여길 ‘능’(凌)에다 하늘 ‘소’(?)를 쓰는 꽃이니 하늘을 조롱하는, 천륜에 도전하는 위험한 꽃인 셈이지. 이 꽃도 질 때는 송이째 몸을 던진다더라. 천륜도 때론 서럽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