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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스마트폰 중독과 독서 불모지의 평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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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03 21:17:46 수정 : 2017-07-03 21: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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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한국의 스마트폰 열풍
국민들에 사대·모방성 강화시켜
서구문명 여러 방면서 한계 노출
인류 위한 새술·새부대 될 수 없어
요즘 지하철을 타 보면 한국인은 영락없는 스마트폰중독자들이다. 승객의 거의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은 젊은이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 남녀노소 상관없이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스마트폰이 잠시라도 없으면 숫제 불안하기까지 하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하철에서 간혹 독서하는 사람을 보면 반갑기도 하지만, 마치 구석기시대의 동족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스마트폰의 효용성도 적지 않다. 정보의 대중화는 물론이고, 정보의 실시간화, 여론의 대중주도 등 좋은 점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으로 읽은 정보와 이미지는 스쳐가는(흘러가는) 것이기에 대뇌에서 깊게 박히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결국 독서가 가져다주는 합리적인 사고력의 증대와는 반대로 인간을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즉물적으로 만든다. 한국의 스마트폰 열풍은 가히 세계적이다. 건강한 정보와 상식 이외에 소문과 정체불명의 지식의 홍수 속에 한국인은 노출돼 있다. 한국인의 성격과 관련해 스마트폰열풍은 걱정을 앞서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창조성보다는 모방성이 강하고, 독자적인 사고보다는 남(구미 선진국)의 사고나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한국인에게 사대-모방성을 강화하고 그러한 문화적 종속을 당연하게 여기는 습관이 붙을까 싶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한국인은 빙의(憑依)의 민족이다. 빙의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나 혼이 남에게 덮어씌워지거나 빙의시킨 존재의 노예가 되거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남의 사고나 아이디어를 강하게 입력하는 것도 광의의 빙의이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빙의이다. 기독교의 성경뿐 아니라 서구의 고전도 성경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풍토이다. 서구의 근대문물은 먼저 접하고 자신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활용한 ‘앵무새 지식인들’로 인해 한국의 정체성은 망각돼 있다. 별로 창조적이지도 못한 선배학자들의 횡포와 소위 갑질이 학원사회를 병들게 한 지 오래다.

서구 종속적 학원사회의 분위기에서 자란 한국의 기성세대가 갑자기 자주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를 향해 스스로 묻고 판단하고 스스로 쓰고, 역사적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절실한 오늘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 따르면 한국인의 읽기능력은 15∼19세 중·고등학교시절까지는 세계에서 1위, 2위를 다투고 있으나 그 후 점차 떨어져 불혹의 나이인 45세부터는 세계에서 최하위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는 독서가 학교수업과 연관되는 것이 많고, 성인이 될수록 스스로 읽고 생각하는 힘이 떨어짐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암기위주 교육정책과 선진국에서 지식을 배워서 쓰는 사대-종속적 사고와 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독서를 하지 않는 국민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한국인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문물들이다. 심지어 생각은 서구인들이 대신해주고 우리는 그들의 생각과 물질문명을 따라가는 것이 선진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머리 아프게 생각은 왜 해? 저들이 생각한 것을 받아먹으면 되지.” 우리는 농담처럼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 인문학 독서가 붐을 이룬 것은 1980∼ 90년대였다. 소위 민주화열풍이 전국에 불던 시기였고, 개발시대의 권위주의에 맞서 특히 마르크시즘 계열의 책이 대학운동권과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때였다. 덕택에 이념서적으로 재미를 본 출판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거대한 물결이 사라졌다. 마르크시즘 붐도 바로 모방의 결과였다. 현재 한국인에겐 남은 것은 지식기술모방과 감정밖에 없다.

서구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한국적으로 걸러짐이 없이 그대로 지배적이 되는 곳이 한국이다. 세계적으로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의 본래모습을 보려면 한국에 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공자의 나라 중국은 석전제(釋奠祭)의 원형을 잃어버려서 한국에서 배워가 복원했을 정도이다. 선불교의 원형도 한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한국의 사찰에 유학 오는 외래승려도 적지 않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가 성황을 이루고 있는 곳도 한국이다. 로마교황청에 한국가톨릭의 입김도 세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교회가 있는 것도 한국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서구문명도 과학기술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여러 방면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서구의 인문학도 저들의 과학기술사회를 정당화하고 선전하고 지원하기에 바쁘다. 서구문명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는 새 술과 새 부대가 될 수 없다.

한국인은 외래사상의 이입과 자신의 감정이입을 통해 살아온 ‘정(情)의 민족’이다. 그래서 독자적인 철학이나 사상과 역사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문화의 종속적 상황은 독서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해외번역물이 판치고, 자생적인 책이라고는 문학류가 고작이다. 스마트폰의 세계 제1수출국은 지식의 세계 제1수입국이다. 요즘은 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기계인간과 인간신을 예고하는 지독하게 서양적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책이다. 지금도 우리는 감탄하며 무작정 쫓아가고 있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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