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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던 날 오후 서귀포에 갔다. 제주 올레를 처음 걷게 될 젊은이 하나가 그곳에서 기다렸다. 비가 너무 거세어 잠시 망설였다. 이 빗속을 뚫고 굳이 길을 가야 하는지. 아무래도 금쪽같은 오후를 애꿎은 술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해외’까지 왔으니. 더불어 길을 걷는 건 ‘따로 또 같이’ 가는 행위라고 했다. 걷다 보면 홀로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보조를 맞출 때는 서로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맞춤하다.

젊은이는 결단을 앞두고 있었다. 청년들의 취업난이야 많이 듣고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이 실제로 겪는 구체적인 과정은 상상 이상이다. 이 젊은이도 많은 내상을 입었던 것 같다. ‘광탈’이란 표현은 그에게 처음 들었다. 무심한 기성세대라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서류전형에 응시해서 ‘광속으로 탈락’하는 게 그 광탈이었다. 어렵사리 서류전형을 통과해도 경쟁이 치열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고, 면접에 가도 붙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 젊은이가 이런 상처를 많이 겪었다는 건 미처 몰랐다. 그도 말을 하지 않았고, 부담을 줄까봐 물어보지도 못했으니.

이 친구, 어렵사리 두 군데 회사에서 입사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하나는 비교적 안정된 조직이고 연봉도 다른 하나에 비해 높다고 했다. 또 하나는 이제 막 시작한 벤처기업인데, 이 친구는 이 스타트업에서 하고 싶은 일에 꽂혀 있었다. 빅데이터를 관리하는 업무라나. 보수적인 관점에서 충고를 했다. 먼저 안정된 상대적으로 큰 조직에서 경험을 해보는 일이 중요하다. 연후 얼마든지 벤처기업은 다시 고를 수 있을 터이다. 녀석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장대비가 그칠 무렵 해무가 가득한 바닷가 검은 현무암 위에 올라가 양팔을 들어 바다를 향해 외치는 젊은이의 모습이 렌즈에 잡혔다.

종착지 올레에 이르러 그는 어느 기업엔가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출근을 하지 못하겠다고. 젊은이의 얼굴엔 시원섭섭한 표정이 역력했다. 노마드 청춘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비록 앞길에 그날처럼 장대비가 내리고 해일이 덮쳐 와도 꿋꿋이 포기하지 않고 길을 가기를. 주눅 들지 않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억지가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아파하는 기성세대도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부디 후회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기를. 척박한 길을 선택한 젊은이 머리에 화관을 씌우듯, 영롱한 빗방울을 매단 부챗살 거미줄이 길 끝에 흔들거렸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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