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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 순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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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13 21:46:02 수정 : 2017-07-14 14: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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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 랴오닝성을 방문했다. 우리 순국선열들이 일제에 치열하게 항쟁했던 곳이다. 산간벽지였던 이 지역에도 현대화 바람을 타고 도시 곳곳에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고층 상가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있었다. 중국의 현대화는 우리 선조들의 대일항쟁지를 흔적조차 찾을 수도 없게 만들고 있다. 대일항쟁지가 이처럼 표지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가슴 먹먹함을 느끼게 한다.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은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치안숙정(治安肅正) 공작을 단행했다. 이를 위해 항일부대와 일반농민들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서간도를 비롯한 남만 지역이 그 중점지역이 됐다. 일제는 항일부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군대는 물론 특무기관까지 동원했다. 일본관동군, 봉천일본영사관, 퉁화일본영사분관 등이 남만 일대에 파견되고 설치됐다. 다른 한편으로 관동군은 남만 일대에 항공기를 동원해 선무공작을 펼쳤다. 조선혁명당 인사들에게는 거액의 현상금도 내걸었다.


중국 랴오닝성 신빈현 샹수이허쯔향 샤오황거우촌으로 가는 길목. 이곳 근처 옥수수밭에서 양세봉(작은사진) 장군이 순국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이무렵 일본관동군 특무기관인 동변도(東邊道: 퉁화 일대)유격대 특무대장 박창해는 퉁화일본영사관과 합작해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 1896~1934) 장군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박창해는 평소 왕래가 잦았던 왕밍팡을 매수했다. 그는 환런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의 연합을 논의하자며 “환런현 샤오황거우 골짜기로 와 달라”며 유인했다. 1934년 8월 12일(음) 장군은 부관 김광욱, 김성해, 김추상과 같이 왕씨를 따라 나섰다. 일행이 다라쯔거우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했고, 왕씨는 장군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옛날의 왕밍팡이 아니다. 이 탄환을 받지 않으려거든 일본군에게 항복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장군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 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씨 등 주구배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장군이 숨진 환런현 샤오황거우촌 삼거리는 퉁화·칭위안·류허로 갈라지는 곳이다. 장군은 독립군 최후의 맹장으로 불린다. 지금도 남북한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추앙받고 있다. 장군이 숨을 거둔 곳에서는 지금도 무심히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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