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중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중강진공립병원 의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해 청년 37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지린성 류허현으로 망명했다.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조맹선이 이끌고 있던 대한독립단에 참여했다.
그 후 1923년에는 베이징으로 이주하여 하이뎬(海甸)에서 안창호 선생 등과 농장을 경영하며 아신의원(亞新醫院)을 열었다. 1926년에는 난징 국민정부의 북벌군 펑위샹(馮玉祥) 총사령관 부대에 참여하여 산시성 다퉁·타이위안 등지에 병원을 설립했다. 이자해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12월 26일 가족들과 함께 시안으로 가기 위해 피란길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첩자로 몰려 린샤현에서 체포됐고 우위안으로 압송돼 감금됐다.
네이멍구자치구 후허하오터시 기독교 묘원에는 의사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자해 선생 부부가 잠들어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
이처럼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자해는 해방 뒤 김구 선생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네이멍구자치구에 정착했다. 그는 1958년에 여든다섯살의 나이에 병원에서 퇴직한 뒤 베이징으로 이주해 딸과 함께 지내다가 1967년에 삶을 마감했다. 네이멍구자치구에 있는 지금의 묘는 1985년 부인 손옥성이 사망한 뒤 합장한 것이다.
류영현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