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바람길 끝에 섰다. 바람길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십이령길, 청보리밭길, 동피랑길, 해파랑길, 구불길, 마실길, 둘레길, 늠내길, 바우길…. 전국에 200개 넘는 다양한 이름의 길들이 생겨났지만 ‘바람길’은 없다. 이 칼럼에 붙인 이름이었을 뿐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모든 길은 바람길이다. 바람도 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임권택 감독이 이청춘 소설로 만든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 중 하나가 청산도 긴 돌담길을 멀리서부터 가까이 걸어 나오며 송화, 동호, 유봉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다. 송화와 유봉은 춤을 추고 동호는 북을 두드리며 함께 노래를 부른다. 5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찍힌 이 길 말미에 등장인물들이 화면 오른쪽으로 노랫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나면 텅 빈 길에는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면서 먼지를 일으킨다. 이 마지막 장면의 바람이 일으키는 먼지야말로 “사람이 살면은 몇 백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라고 부르던 유봉의 소리 여운을 쓸쓸하게 뒷받침하는 명품이다.

아예 ‘길’(La Strada)이라는 제목을 붙인 1954년 이탈리아 영화도 생각난다. 고물차 하나 몰고 유랑하는 차력사 잠파노가 어리숙한 소녀 젤소미나를 사와 함께 돌아다니다, 여자를 버리고 도망친 후 나중에야 그녀의 죽음 앞에서 밤바다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는 스토리다. 죽은 앤서니 퀸이 열연한 잠파노는 젤소미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미숙한 사내였다. 뒤늦게 사랑의 여운을 감지한 그가 후회하지만 그이 앞에는 다시 떠나야 할 길이 놓여 있을 뿐이다. 길 위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기는 어렵다.

황석영 소설 ‘삼포 가는 길’도 길을 내세운 대표적인 문학작품 중 하나다. 부랑 노무자 영달과 정씨가 눈 내리는 길을 걸으며 귀향하는 이야기. 그들은 도중에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나 떠돌이로 살아가는 처지를 나누며 밑바닥 인생의 설움을 공감하다가 헤어진다. 도망친 작부를 잡아다주면 돈을 주겠다는 술집 주인의 부탁을 받은 밑바닥 인총들은 모처럼 설움의 연대를 형성해 거부한다. 그들은 그렇게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각자 눈길을 걸어 떠나갔다.

서편제 소리꾼들이 걸어간 길이나, 잠파노와 젤소미나가 유랑하던 길, 영달과 정씨와 백화가 걷던 눈길은 기실 모두 같은 길이다. 우리는 모두 어디에 있든 시간 위의 길을 가고 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걷고 있든 가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이 길 위에서 다양한 처지 여러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고 사연 많은 풍광들을 접할 터이다. 부디 주저앉지 말고 서로 부축해 바람 부는 인생길, 무사히 끝까지 걸어갈 일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
  • 오마이걸 유아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