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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의 애타는 소리
“이제 해외로 나갈 때다”
노동·규제 개혁 사라진 나라
경제 조종은 머지않다
10여년 전 중국에서 만난 기업인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신발산업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왜 그럴까. 몰딩 기술자들이 모두 중국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빼어난 몰딩 기술로 ‘세계의 신발공장’으로 우뚝 섰다고 한다. 이런 말도 했다. “아무도 그들의 노하우를 대신할 수 없다”, “중국은 한국 신발을 딛고 일어섰다.”

고비용·저효율에 멍든 1990년대, 많은 기업은 떠났다. 산업공동화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공장만 떠났을까. 숙련된 기술자도 따라갔다. 나중에는 중국 기업의 스카우트 바람까지 불었다. “중국 신발도 괜찮네.” 이런 말은 기술 노하우가 넘어간 뒤 나온 소리다. 지금 중국산 신발은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 신발산업만 그런 걸까.


강호원 논설위원
참담한 일은 또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휴대통신 핵심기술인 CDMA의 산실과도 같은 곳이다. 1990년대 말 닥친 외환위기에 그곳 두뇌는 뿔뿔이 흩어졌다. 연구원 세 명 중 한 명꼴로 떠났다. 어디로 갔을까. 많은 연구원이 미국으로 갔다. 그들은 핵심 인재였다. 전자통신연구원만 쓰린 경험을 했을까. 다른 많은 연구소도 마찬가지다.

기술자와 과학자를 지키지 못한 나라. 장인 정신이 꿈틀대겠는가, 노벨상 수상자가 쏟아지겠는가. 트라우마 때문일까,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딴 최고급 두뇌 10명 중 6명은 귀국하지 않는다.

2000년대 이후 이어진 저성장. 성장은 왜 멈춘 걸까. 경제구조가 선진국처럼 변했기 때문일까. 그런 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무뇌국(無腦國)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삼성전자는 뭐냐”고 할지 모르겠다. 삼성은 두뇌를 지킨 곳이다. 외환위기 때 자사의 신용으로 정부외채 보증까지 설 정도로 신용이 탄탄했다. 외환위기에도 두뇌를 지켰다. 그러기에 오늘의 삼성이 있다. 지난 20년간 기술자와 과학자를 지켰다면 나라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고비용 바람은 다시 매몰차게 분다.

1919년 경성방직으로 시작해 98년 동안 옷감을 짜온 경방이 한국을 떠나겠다고 했다. 김준 경방 회장, “생존이 경각에 달렸다” “이대로 가면 공장을 폐쇄할 수밖에 없다.”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 기치를 이제 내려야 할 판이다. 조규옥 전방 회장, “이럴 바엔 남들 다 해외로 나갈 때 함께 보따리를 쌌어야 했는데 괜히 버티다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 몰고 온 파문이다. 경방과 전방은 ‘방직 빅5’다. 방직산업의 조종(弔鐘)은 머지않다. 다른 산업은 괜찮은 걸까.

두 기업인의 말을 두고 거짓말을 한다는 식의 비판을 한다. 많은 전통산업이 고비용 구조에 멍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뭐가 어렵냐”고 윽박지른다면 그들은 누구에게 어려움을 호소해야 하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고도(孤島)에 나앉은 심경일 성싶다. 두 회장만 그럴까.

전자통신연구원의 악몽도 되살아나고 있다.

탈핵 정책을 두고 걱정이 쏟아진다. 그중 하나, 한국형 원전 개발을 주도한 이병령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원전 사업을 중단하면 약 360명의 원전 설계 인력이 해외로 대거 스카우트될 것 같다.” 무슨 말일까. 수십 년에 걸쳐 쌓은 탑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세계 3대 원전기술국? 기술자가 떠난 나라에 붙은 ‘기술국’ 호칭은 폐허로 변한 도시를 알리는 녹슨 이정표다. 누가 그런 나라에 원전 건설을 맡길까. 원전 해체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했다. 해체 기술로 돈을 벌겠다는 건가. 그런 시장이 있다 해도 기술자도 없는 나라에 해체를 맡길까. 답은 빤하다.

통계 하나. 올 2분기 대기업 취업자가 7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왜 줄었을까. 투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공장을 지어 봐야 손해 본다는 생각이 앞서는 탓이다. 막대한 유보금을 쌓아두지 않았냐고? 이런 말을 한다. “이제 해외로 나갈 때다.”

1990년대 나라를 흔든 기업 탈출 쓰나미는 다시 밀려들고 있다. 두 번째 파고다. 인재 탈출 사태도 뒤따르지 않을까. 노동·규제 개혁 소리가 사라진 나라. 경제 조종은 머지않은 것 아닐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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