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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기적의 코리아’를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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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04 00:23:21 수정 : 2017-08-04 00: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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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찌꺼기 먹던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자동차 공장 운영 / 수많은 불가사의 존재하지만 그걸 잊고 스스로 깎아내려 기적을 믿는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노병의 증언에 귀를 열어보라. 연단에 오른 노병이 시간여행을 떠난 곳은 6·25전쟁이 터진 1950년 가을 경기도 문산 부근이었다. 67년 전 열여섯 살이던 그는 동방의 작은 나라를 지키려고 태평양을 건넜다. 노병은 영사기를 돌리듯 가슴속에 묻어둔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8살쯤 된 소년이었어요. 철조망 틈새로 기어오더니 미군들의 잔반을 몰래 갖고 나가 식구들과 나눠먹었어요. 병사들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기도 했죠. 하지만 소년은 그 일을 멈추지 않았어요. 우리가 버린 음식찌꺼기가 그들에겐 목숨을 이어주는 생명줄이었거든요.”

전투 중에 수류탄 파편을 맞은 노병은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참전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압니다. 당신들의 조부모, 친척들이 겪은 고난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한국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인사말을 마친 노병의 눈가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눈자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참전용사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지난주 6·25전쟁 정전기념일을 앞두고 개최된 미국 앨라배마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에서 현대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아진산업은 5년째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을 열고 있다.

배연국 논설실장
백발이 성성한 노병이 증언한 것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기적임이 분명했다. 음식찌꺼기를 훔쳐 먹던 한국인들이 한두 세대 후에 되레 미국인들을 먹여 살릴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현대차와 부품 업체들은 앨라배마의 허허벌판에 자동차 공장을 지어 수만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주정부는 법까지 고쳐 210만평의 공장 부지를 단돈 1달러에 제공했다. ‘기적의 코리아’를 영접하기 위한 미국식 통과의례였다.

우리는 어떤가. 기적의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히 그것을 잊고 산다. 가난과 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한 놀라운 역사를 스스로 깎아내린다. 청년 세대는 기적을 일군 기성세대를 ‘꼰대’ 취급하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나약을 힐난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고서도 양쪽 세력은 상대를 향해 서로 손가락질한다.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삼성은 국내에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전에 장대환 매일경제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를 국내에 초청한 적이 있었어요. 그분에게 강연을 하기 전에 미리 한국 역사를 공부해 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나중에 와서 한다는 말이 ‘너희 나라는 벌써 없어져야 할 나란데 참 이상하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5000년 동안 망하지 않고 존속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얘기였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그 학자의 나라를 비롯한 16개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던진 것 역시 불가사의 아니던가.

기적의 소중한 가치를 새삼 일깨워준 이는 아진산업의 서중호 대표이다. 그는 “마지막 한 명의 참전용사가 살아 있는 날까지 보은 행사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국가도, 대기업도 하지 못한 일을 이름조차 생소한 중견기업이 하고 있다니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번진 적이 있다. 그들이 제기한 온갖 부조리와 병폐를 부인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러한 병폐들은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의 잘못이지 국가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나라를 탓하지 말라. 100년 전 조선의 치부를 들춰내며 기적의 대한민국을 폄하하지 말라.

잊지 마라. 비록 삶이 팍팍할지라도 기적의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 기적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 희생을 치러야 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겐 기적의 유산을 후대에 전할 책무가 있다. 기적을 일군 할아버지 세대는 아버지 세대에게, 아버지 세대는 아들 세대에게, 그리고 손자 세대에게, 증손자 세대에게…. 매를 맞으며 철조망을 넘던 ‘어린 한국인’들이 이룬 기적 같은 역사 말이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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