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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1653년 8월 하멜, 제주도에 표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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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0 21:20:59 수정 : 2017-08-10 21: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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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급여 청구자료였던 하멜표류기
17세기 미지의 나라 조선 세계에 알려
360여 년 전인 1653년(효종 4) 8월, 지금처럼 무더웠던 제주와 인연을 맺은 서양인이 있었다. ‘하멜표류기’의 저자로 알려진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1630~1692) 일행이다.

8월 6일 제주목사 이원진은 서양인들의 표착을 알리는 보고서를 올렸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과 판관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 일본어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찬인가’ 하니, 다들 맞다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하고,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나가사키라 하였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접한 효종은 이들을 한양으로 올려 보낼 것을 명하였다.

하멜 일행은 1653년 7월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 끝에 제주도에 이르렀다. 하멜 일행은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고, 통역은 1627년에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조선명 박연)가 맡았다. 이듬해 6월 한양으로 압송된 이들은 화포를 잘 다루는 기술이 있다는 이유로 훈련도감에 편입됐다. 이후 하멜 일행은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조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끝까지 억류돼야 할 운명에 처했다. 한양에서 힘든 생활이 지속되자 탈출을 시도했으며, 이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는 이들을 강진의 전라병영과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분산 배치했다. 여수에서 훈련장에 나가 화살을 줍고, 매일 새끼를 꼬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하멜은 희망을 잃지 않고 동료 선원 7명과 함께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탈출을 시도했고, 마침내 13년간의 억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하멜은 밀린 월급의 상환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수용되지 않자 네덜란드로 돌아가 암스테르담의 담당자에게 다시 월급을 청구하고 조선에서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처럼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밀린 급여를 청구하기 위해 증거 자료 확보를 위해 쓰기 시작했지만 결국 17세기 미지의 나라 조선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662년의 “올해는 추수를 할 때까지 상황이 어려워서 수천 명의 사람이 기근으로 죽어갔다. 도로를 이용하기가 어려웠는데, 그것은 도둑들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기록 등에는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방망이로 치는 바람에 그 봉우리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산방산. 그 산방산이 내려다보이는 용머리 해안에는 하멜기념비와 함께 하멜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이들이 타고 온 배 모양의 상선전시관이 조성돼 있다. 상선전시관에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 히딩크 감독을 기념하는 공간도 만들어 네덜란드와의 각별한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360년 전 하멜이 쓴 조선보고서 ‘하멜표류기’는 17세기 조선의 사회상과 더불어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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