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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바보를 통해서, 바보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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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4 23:17:59 수정 : 2017-08-14 23: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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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배’, 중세 때 바보들 조롱한 풍자시편 / 500여년 전 거론 ‘바보들 항해’는 진행형
숲 속의 제왕인 늙은 사자가 동굴에 앓아 누웠다는 소문이 퍼졌다. 숲 속 동물들이 문병하러 동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번 들어간 동물은 제 발로 나올 수 없었다. 사자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이다. 꾀병으로 앉아서 먹이를 취한 사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것이다.

그런데 여우만은 달랐다. 여우는 동굴로 들어가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이솝우화’에 전하는 이 대목을 중세 시절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던 ‘바보배’는 이렇게 표현한다. “여우는 동굴에 들어간 동물이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앗 뜨거라, 그 동굴에 안 들어갔다네.” 그러면서 바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한다. 바보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바보가 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앞에서 바보가 호되게 넘어지는 꼴을 보고도 뒤에서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수염을 잡게 된다네.”

법학자이자 인문학자였던 제바스티안 브란트가 1494년 펴낸 ‘바보배’는 중세 시절 세상의 모든 바보를 한 배에 태워 그들의 행태와 상황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조롱한 풍자시편이다.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갔고 십자군 전쟁으로 피폐했던 상황에서 저자는 탐욕을 가진 바보, 이간질하는 바보, 바른 조언을 안 듣는 바보, 예의를 모르는 바보, 경거망동하는 바보, 육욕에 빠진 바보, 계획을 세울 줄 모르는 바보, 부질없는 재물을 숭상하는 바보, 과식하고 식탐을 부리는 바보, 행운을 맹신하는 바보, 근심에 짓눌린 바보, 저 혼자 옳다는 바보, 미루기 좋아하는 바보, 뻔한 음모를 꾸미는 바보, 쾌락에 빠지는 바보, 돈을 보고 구혼하는 바보, 질투와 증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바보, 권력의 종말을 모르는 바보, 고마움을 모르는 바보, 어려운 때를 준비하지 않는 바보 등 다채로운 바보의 풍경을 연출한다.

이런저런 바보들은 어쩌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브란트의 ‘바보배’ 객실에는 이런 바보도 있다. “좋은 말씀 듣고도/ 지혜가 늘어나지 않는 사람”, “오만 가지 경험을 쌓으려고 아등바등하지만/ 나아지는 게 전혀 없는 사람”,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고도/ 바른 행실과 이성을 깨치지 못한 사람”은 “멍청한 암소가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과 다르지 않은 이들은 변할 줄 모르는 바보다. 그들에게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길 떠난 나그네가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여행의 명예는 빛을 잃으리./ 모세가 이집트에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다니엘이 멀리 갈데아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누가 그들의 업적을 칭송했겠나?” 또 고집불통 바보를 향한 브란트의 경고도 촌철살인에 값한다. “가시에 긁혀서 생채기가 난다네./ 남의 도움은 필요 없다면서/ 혼자만 약았다면서/ 매사에 저 홀로 척척박사인 사람은./그런 사람은 평지에서도 길을 헤매다가/ 길 없는 오솔길에 들어서 길을 잃고/ 집에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네.”

이솝우화의 여우 이야기처럼 바보를 반면교사로 삼아 지혜로운 삶의 가능성을 브란트는 궁리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얘기되는 ‘바보배’는 세상의 모든 바보를 통해서 바보 같은 삶을 넘어설 수 있기를 소망한 예지의 시편들이다. 놀라운 것은 브란트가 500여 년 전 거론하고 경계했던 바보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문제적이라는 사실이다. 바보들의 행진, 바보들의 항해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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